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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흐른다/한국고전

육상궁【毓祥宮】칠궁【七宮】

by 東以 2012. 2. 13.

육상궁【毓祥宮】 칠궁【七宮】

 

종    목 : 사적 제149호 
명    칭 : 육상궁(지상건물일체포함) 毓祥宮(地上建物一切包含) 
분    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제사유적 | 제사터 
수량|면적 : 25,791㎡ 
지 정 일 : 1966.03.22 
소 재 지 : 서울 종로구 궁정동 1-1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관 리 자 : 경복궁

 

 

칠궁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의 사친(私親: 임금의 생모)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일곱 후궁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왕의 친모나 미즉위 왕세자 등의 사묘(祠廟)를 궁(宮)·전(殿) 또는 묘(廟)로 호칭하는 등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지금에 전하는 것은 칠궁 정도이다. 궁은 왕세자·비빈 등의 거소를 호칭하는 것이나, 그들이 사망한 뒤 그대로 사묘로 사용한 데서 사묘의 칭호에 궁이 붙게 된 것 같다.

현재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경내에 자리한 칠궁은 일곱 후궁의 사당이지만, 원래 이곳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로 1725년(영조원년)에 세워졌으며 1744년(영조20년) 육상묘(毓祥廟)로 개칭되었고, 그 후 1753년(영조29년) 육상묘를 육상궁(毓祥宮)으로 묘(廟)에서 궁(宮)으로 개칭하면서 묘소는 원(園)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1908년(융희 2년)에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연호궁(延祜宮)·선희궁(宣禧宮)·경우궁(景祐宮)이 육상궁의 경내에 합사(合祀)됨으로써 육궁(六宮)이 되었고, 다시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칠궁이 되었으며, 공식 명칭은 육상궁(毓祥宮)이다.

그리고 이 칠궁은 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삼락당(三樂堂) 그리고 냉천정(冷泉亭)과 냉천(冷泉), 이안청(移安廳), 전사청(典祀廳), 헌관집사청(獻官執事廳),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 자연(紫淵) 등의 부속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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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필육상묘도(鄭歚筆毓祥廟圖) 1739년(영조 15년) 보물 제873호, 개인 소장
북악산 밑에 있는 초가집 건물은 처음 지었던 숙빈최씨의 사당이다. 그 앞에는 홍살문이 있어 비록 초가이지만
이 건물이 사당임을 알려준다. 이 그림의 위에는 부묘도감(祔廟都監: 부묘란 상례기간을 마친 뒤 신위를 종묘
또는 사당에 옮겨 봉안하는 것)의 좌목(座目) 즉, 이 사당을 세우는 데 참여한 관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관원은 총 책임자인 좌의정 조문명(趙文命) 이하 18명이다.

 

 

정선(鄭敾) 장안연우(長安煙雨) 1741년(영조 17년) 서울 간송미술관 소장『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내
북악산 서쪽에서 멀리 관악산 사이의 서울 장안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 앞 소나무 뒤에 있는 사당은 육상궁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통하여 육상궁은 지금의 남향과 달리 처음 지었을 때에는 서향 또는 서남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45년 겸재 정선이 그린 육상묘도(毓祥廟圖 보물 제873호)를 보면 홍살문 안에 소박한 초가집으로 사당이 그려져 있고 뒤에 백악(북악)산이 있고, 주목으로 보이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육상궁이 현재와 같이 기와집, 담장, 재실과 수복방 등의 제도를 갖추게 된 것은 1753년 묘(廟)에서 궁(宮)으로 개칭하면서부터로 보인다.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은 한 사당에 같이 합사되어 있고, 서쪽 담장 안으로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이 있으며 선희궁과 경우궁도 한 사당에 신주를 같이 모셔놓았으며, 매년<보통 10월4째주 월요일>「칠궁제」를 지내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인 종묘(宗廟)와 함께 묘사(廟祠)제도의 귀중한 표본으로 인정받아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육상궁 정문인 외삼문(外三門 | 天授門 | 神三門)이다.

현재 이 문은 사용하지 않고 재실 정문을 출입구로 사용한다.

 

 

육상궁(칠궁)으로 들어가는 재실 정문이며, 안내 도우미가 보인다.
사진 우측 뒤로 보이는 밝은색 건물이 청와대 국빈 접견소 영빈관이며, 저 방향으로 사진을 찍는 것은 통제한다.
원래 육상궁(칠궁) 권역은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 저 영빈관을 건립하면서 그 규모를 3분의 1로 축소하였다고 한다.

 

 

재실 정문에서 바라본 육상궁(칠궁) 내부, 제일 처음 만나게 될 송죽재와 풍월헌, 그 뒤로 삼락당이 보인다.

 

 

 

 

 

 

송죽재(松竹齋)풍월헌(風月軒) 육상궁을 관리하는 관헌이 거처하며, 제사를 준비하던 재실이다.

송죽(松竹)은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하며, 변하지 않는 절개를 상징하는 말이다.
사철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처럼 관원들도 재실에 머물며 늘 변치 않는 마음을 가지라는 뜻을 담은 듯하다.
풍월(風月)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란 의미이다.
이곳이 재계하는 곳이므로 정신을 깨끗하고 고상하게 가진다는 의미를 담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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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칠궁의 재실(齋室)인 이 건물에는 현재 <송죽재>와 <풍월헌>이란 두 현액이 걸려 있다. 이를 통하여 이전에는 이와 관련된 두 채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건물의 이름은 영조가 육상궁에 행차할 때 머물렀던 재실인 풍월헌, 그리고 1882년(고종 19년)의 화재 당시 영조의 어진을 옮겨 모셨던 송죽정(松竹亭)이라고 본다. 1772년(영조 48년) 영조는 숙빈최씨에게 영강(永康)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시보책(諡寶冊)을 육상궁 풍월헌에 봉안하게 한 바 있다.

이 건물은 위 기록들과 건축 양식 등으로 볼 때 1882년의 육상궁 화재 이후 건립된 듯하다. 이 때 송죽정의 뒤를 이은 이름이 송죽재다. 이 건물에는 한 때 각종 현판과 물품을 보관한 바 있었다.

한편 왕·세자·세손이 혼인할 때에는 왕궁 밖 별궁에서, 왕자·왕녀 등이 혼인할 때는 왕궁 밖 길례궁(吉禮宮)에서 의식을 치렀다. 즉 왕실의 혼인은 왕궁과 사가(私家)사이에 별도의 장소를 정하여 혼인을 치룬 것이다. 이 가운데 왕녀의 혼인시 부마는 길례궁에서 머물고 왕녀는 옹주궁(翁主宮)에서 머물게 하였다.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년)와 부마 김한신(金漢藎: 1720~1758년)이 혼인할 때의 기록이『옹정십년임자십이월 길례시자초 간택위시일기雍正十年壬子十二月吉禮時自初揀擇爲始日記, 1732년(영조 8년)』이다. 이 일기에서 길례궁은 임창군(臨昌君: 소현세자의 3남인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은 화순옹주 길례 때 혼주였음) 이혼(李焜)의 집이고, 화순옹주가 머물던 옹주궁은 대궁(大宮)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대궁이 어느 곳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 일기에서 10월 29일 대궁 안 삼락당(三樂堂)에서의 1. 납채(納采)를 받았고, 11월 8일 2. 납폐(納幣) 11월 29일 3. 전안(奠雁) 예를 거행하였으며, 11월 29일 “대궁 삼락당에서 전안을 마친 뒤 부마 김한신은 집을 나와 안사랑 송죽재에서 머물렀다”라는 기록과 “12월 1일 부마와 공주가 대궁에 갔다. 대궁의 사묘(私廟)와 정빈이씨 사당에 4. 현례(見禮)를 드린 후 길례궁으로 갔다” 는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삼락당과 송죽재는 대궁안에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묘와 정빈이씨의 사당이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대궁은 뒤에서 소개하는 창의궁(彰義宮)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견해가 사실이라면 지금 칠궁에 있는 삼락당과 송죽재는 어쩌면 1882년(고종 19년) 육상궁이 화재를 겪은 뒤 복원할 때 창의궁으로 부터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다만 옮겨 온 한 건물에 <송죽재>와 <풍월헌>이라는 두개의 현액이 걸리게 되었는데 송죽재는 이 건물이 재실임에서 또 옛 송죽정 건물을 계승한 이름으로, 풍월헌은 화재로 인하여 사라진 옛 풍월헌을 계승한 이름이라고 추정하여 본다.

1. 납채(納采)
신랑측 혼주(婚主)가 예서에 있는 서식에 따라 신부집에 편지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편지에는 주소·관직·성명을 적고 간단한 문구로 혼인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2. 납폐(納幣)
신랑집에서 폐백으로 푸른 비단과 붉은 비단을 신부집으로 보내는 일

3. 전안(奠雁)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재배하는 의식

4. 현례(見禮)
혼례 때 신부가 시댁 조상과 친척에게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예



송죽재 현액(懸額)


풍월헌 현액(懸額)
고종(高宗) 어필(御筆)로 추정된다.



송죽재와 풍월헌



송죽재와 풍월헌의 뒷편
오른쪽의 팔작지붕은 삼락당(三樂堂)이다.

 

 

 

 

 

삼락당으로 통하는 문이 보인다.

 

 

 

 

삼락당(三樂堂)이다.

 

 

삼락당을 휘감고 돌아간다.

 

 

내삼문(內三門)이다.

 

 

내삼문을 지나 동쪽 삼문과 서쪽 삼문 사이에 있는 냉천정(冷泉亭)이다.
영조가 어머니 제삿날에 재계(齋戒)하며 제를 준비하던 곳이다.

 

 

 

 

 

 

 

 

냉천정을 지나는 길목

 

 

냉천정 앞 뜰에 있는 자연(紫淵), 냉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고이도록 석축을 쌓아 만든 정사각형의 작은 연못.
자연(紫淵)은 자줏빛이 감도는 연못이란 뜻이며 자줏빛은 수심이 깊은 연못의 빛깔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뜻으로 지은 것은 아니며 '자연'이란 용어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는 도가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정면 석축 한가운데에 紫淵이라 새겨진 각자(刻字).

 

 

냉천정 뒤쪽에 있는 우물 냉천(冷泉)이며, '차가운 샘'이란 뜻이다.
냉천 우물 상단 벽면에 영조의 친필(1727, 영조 3년) 냉천과 오언절구(五言絶句 : 오언시) 각자(刻字)가 있다.

御墨雲翰(어묵운한) 임금이 글을 새기다
昔年靈隱中(석년영은중) 옛적에는 영은에 있었고
今日此亭內(금일차정내) 오늘은 이 정자 안에 있네.
雙手弄淸漪(쌍수농청의) 두 손으로 맑은 물 어루만지니
冷泉自可愛(냉천자가애) 냉천이 절로 사랑스럽네.
時强圉協洽?月上浣也(시강어협흡병월상완야) 정미(1727년) 3월 초순.

영은(靈隱)은 중국의 유명한 경승지인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서쪽에 있는 영은산을 말한다.
항주의 지사(知事)로 부임한 소동파(蘇東坡)가 이 산의 냉천정(冷泉亭)에서 많은 시를 지었다.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솟을대문이 하나 더 있다.

 

 

왼쪽으로 재실(齋室)이 있고, 정면에 덕안궁이 있다.

 

 

덕안궁(德安宮)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897년(광무 원년)에 엄귀비가 아들을 낳으면서 경운궁 안에 거처할 궁을 세워 그 궁을 경선궁이라 불렀으며, 엄귀비가 세상을 떠나자 덕안궁으로 개칭되었고 1929년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안궁 뒤로는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나란히 있다.

 

 

 

 

 

 

저경궁(儲慶宮) 선조의 후궁이며, 사후 왕의 칭호를 받은 원종을 낳은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원종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의 칭호를 받았다. 인빈이 세상을 떠난 후 원종이 살던 송현궁에 신위를 모시고 저경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저경궁은 1870년(고종 7년)에 계동에 있는 경우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우궁과 선희궁은 같이 봉안되어있다.

경우궁(景祐宮)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수빈은 순조 20년(1820)에 세상을 떠났고, 이듬 해 신주를 창경궁 안에 모시고 현사궁이라 이름 지었다. 이후 현재의 종로구 계동의 양덕방에 따로 묘를 세우고 이름을 경우궁으로 지어 신주를 모셨다. 이후 이 궁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현재의 옥인동인 인왕동으로 옮겨졌다가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희궁 (宣禧宮)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생모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신주를 봉안한 묘사(廟祠)이다.

 

 

대빈궁(大嬪宮)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 27년(1701)에 희빈이 사망한 후 신위를 정동에 있는 집에 모셨다가 경종 2년(1722)에 희빈에게 옥산대부인의 칭호를 내리면서 사당을 현재의 교동인 경행방에 세웠다. 대빈궁은 고종 7년(1870)에 다시 돌아갔고,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다시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연호궁과 육상궁이다.

 

 

연호궁과 육상궁 입구 삼문.

 

 

삼문에서 바라본 연호궁 현액.

 

 

연호궁과 육상궁은 합사되어 있다. 밖의 현액은 연호궁으로 걸려있으나 안쪽에는 영조친필육상묘(毓祥廟) 현액이 걸려있다.

 

 

 

 

배전(拜殿)과 삼도(三道)

 

 

연호궁(延祜宮) 영조의 후궁이며, 사후 왕의 칭호를 받은 진종을 낳은 정빈 이씨(靖嬪李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진종은 정빈에게서 태어나 세자로 정해졌지만 10세에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즉위 후, 진종에게 왕의 칭호를 주고 정빈을 위해 정조 2년(1778)에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우게 하고 연호궁이라 이름 지었다. 연호궁은 고종 7년(1870)에 육상궁 안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육상궁(毓祥宮)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1725년(영조 원년)에 숙빈 묘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으나 1744년(영조 20년)에 육상묘로 개칭하였고, 다시 1753년(영조 29년)에 육상궁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882년(고종 19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다음 해에 다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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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당쟁이 격화되어 반대파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숙종의 시대, 서인으로 대표되는 인현왕후와 남인으로 대표되는 장희빈 사이에서 숙종의 승은을 입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자신과 아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숙빈 최씨, 궁궐에서 쓸 물을 위해 온종일 물동이를 이고 날랐던 한 여인의 숨어있는 눈물이 어떻게 파랗게 승화되어 조선 제일의 여인상, 어머니상으로 만들어져 가는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번 느껴보자.


■ 개설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英祖)의 어머니(私親)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무수리에서 일약 왕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의 숨어있는 눈물이 배어있는 곳인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궁정동(宮井洞). 궁궐과 우물이 지명에 함께 포함돼 있는 궁정동은 숙빈 최씨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숙빈 최씨는 7세에 궁에 들어와 궁녀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수사(水賜: 궁궐에 필요한 물을 나르는 무수리)였다. 바로 이 궁정동의 옛 자리에 궁궐에서 주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궁중에서 가장 천하다는 무수리로 입궐하여,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延礽君)을 낳고, 마침내 그 품계가 정1품 빈(嬪)에까지 이르렀고, 아들인 연잉군은 왕위에 올라 52년간이나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니,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 숙빈 최씨는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여인의 표상이었다.


■ 태생과 관련된 기록

1. 영조가 즉위 1년(1725) 금평위 박필성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에는 숙빈 최씨의 아버지는 최효원으로 충무위부사과이며,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어머니이다. 숙종 2년(1676)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갔으며,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대하되 공손하고 부드러워 모두 그 환심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야사에는 최씨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사람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부친 민유중(閔維重)이 인현왕후를 업은 부인 송씨와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에서 고아로 떠돌던 최씨 소녀를 만났다.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어린 숙빈이 당시 7세였던 인현왕후와 닮은 데가 많은 것을 보고는 가엽게 여겨 함께 데리고 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입궐하면서 궁녀로 들어왔다고 한다.


■ 숙종과 최씨의 드라마틱한 만남

1. 숙종은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무렵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이문정이 쓴 수문록(隨聞錄)을 보면,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킨 지 5, 6년이 지난 후 어느 날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그 방을 찾았다. 최씨는 자신의 방에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에게 자신이 모셨던 민씨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다. 사유를 묻는 숙종에게 내일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어서 왕후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비는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2. 숙종은 궁녀만도 못한 자신의 경솔했던 처사를 후회하면서, 옛 주인을 섬기는 그 궁녀를 갸륵하게 여겨 가까이 했고, 아들을 낳았다.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영수라고 지었지만, 두 달 만에 조졸하고 만다. 숙종 20년(1694) 9월 최씨가 둘째 아이(연잉군, 영조)를 출산하자 숙종은 출산을 도운 호산청의 내시와 의관에게 내구마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윤지완이 ‘내구마가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차자를 올려 반발했지만 왕자가 드물었던 궁궐에서 숙종의 기쁨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무수리 최씨는 숙원에서 내명부 1품인 빈으로 책봉되는 영광을 안았다.


■ 숙빈 최씨, 장희빈과 대척점에 서다.

1. 장희빈의 득세로 권력을 되찾은 남인 세력을 몰아내는데 두 차례에 걸쳐 숙종에게 결정적인 밀고를 한 사람이 바로 숙빈 최씨였다. 수문록에 주로 장씨가 최씨를 핍박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최씨가 서인인 인현왕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빈 최씨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연결되어 있던 숙종의 유모인 봉보부인과도 가까웠다.

2. 숙종 20년(1694)에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보면, 인현왕후의 오빠였던 민진원은 단암만록(丹巖慢錄)에서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하여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정은 남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서인 김춘택은 남인에게 빼앗긴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서인들과 모의를 하고 있던 중, 여기에 가담했던 김석주의 가인(家人) 함이완이 남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게 되었다.

이를 들은 숙종이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도록 하자 서인은 오히려 남인 장희빈의 오라버니 장희재가 장모로 하여금 숙빈 최씨의 생일날 독이 든 음식을 가지고 입궐케 하여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최씨가 독살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측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들을 정계에서 퇴출시키고 이후로 조정은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3.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가 병사한 후 장희빈이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고 했다며 자진명령을 내린다. 세자의 애걸과 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장희빈은 10월 10일 사사된다. 실록을 보면, “대행 왕비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 장씨는 비단 한번도 기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라고 일컬었으며,....... 취선당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하였다.”


■ 숙빈 최씨, 아들을 통해 다시 태어나다.

1. 숙빈 최씨는 숙종 44년(1718)에 49세의 나이로,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별세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이 아닌, 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어머니의 불행한 신분을 잊지 못했다.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2. 영조는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의식으로 즉위 초부터 숙빈 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즉위 후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후일을 기약하고 숙빈 해주 최씨 소령묘(昭寧墓)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영조의 마음을 읽은 몇몇 사람들이 소령원을 능으로 추봉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조는 상소의 내면에 숨겨진 뜻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조는 즉위하던 해인 1724년 생모를 기리기 위해 경복궁(景福宮) 이웃에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숙빈묘(淑嬪廟)라 했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짓고는 직접 제문을 지어 올리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영조 20년(1744), 영조는 어머니의 묘호를 '소령'으로 올린 뒤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비)에 이런 글을 새겼다. “아!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3. 영조 29년(1753)에는 숙빈묘를 승격시켜 육상궁(毓祥宮)이라 부르면서, 다시 한번 소령원(昭寧園)에 친필 비석을 세우게 된다.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붙였고 후 조선국 화경 숙빈 소령원이라는 친필 비문을 새긴 비석을 만들었다. 숙빈 최씨의 묘소는 소령원으로 봉해졌다.


■ 결어

역사적으로 보면, 숙빈 최씨는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된 상황에서, 지난날 중전의 자애로움을 잊지 못해 상기하다가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는 의로운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환국의 정국에서 정세를 세밀히 꿰뚫어 내다보면서, 자신과 아들 연잉군의 삶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놓고, 슬기롭게 잘 대처해 나갔던 총명하고 영민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육상궁 담장

 

 

 

 

 

중문을 나서면...

 

 

처음 들어갈 때 보았던 송죽재와 풍월헌, 삼락당 뒤편으로 나오며 답사를 마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