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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흐른다/한국고전

칠궁(七宮) 육상궁(毓祥宮)

by 東以 2009. 7. 30.


칠궁七宮 육상궁毓祥宮



칠궁(七宮)은 사적 제149호이며 서울시 종로구 궁정동 1-1 청와대 경내에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왕의 사친(私親)이지만 왕비에 오르지 못한 일곱 후궁(後宮)의 신주(神主)를 모신 사당(祠堂)이다.
쉽게 말해서 후궁의 신주는 종묘(宗廟)에 모실 수 없으므로 그들만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원래 이곳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로 1724년(영조원년)에 세워졌으며 1744년(영조20년) 육상묘(毓祥廟)로 바뀌었고, 그 후 1753년(영조29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되었다.

그 후 1908년(융희 2년)에 저경궁(儲慶宮)·대빈궁(大嬪宮)·경우궁(景祐宮)·선희궁(宣禧宮)·연호궁(延祜宮)이 육상궁의 경내에 합사(合祀)됨으로써 육궁(六宮)이 되었고, 다시 1929년 덕안궁(德安宮)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칠궁이 되었으며, 공식 명칭은 육상궁(毓祥宮)이다.[1]

그리고 이 칠궁은 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삼락당(三樂堂) 그리고 냉천정(冷泉亭)과 냉천(冷泉), 이안청(移安廳), 전사청(典祀廳), 헌관집사청(獻官執事廳), 수복방(守僕房), 재실(齋室), 자연(紫淵) 등의 부속시설이 포함되어 있다.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은 한 사당에 같이 합사되어 있고 서쪽 담장 안으로는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이 있으며 선희궁과 경우궁도 한 사당에 신주를 같이 모셔놓았으며, 매년<보통 10월4째주 월요일>「칠궁제」를 지내고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인 종묘(宗廟)와 함께 묘사(廟祠)제도의 귀중한 표본으로 인정받아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칠궁 정문인 외삼문이다. 하지만 현재 사용되지 않는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솟을대문(삼문)이 나온다.

 

 

송죽재와 풍월헌 앞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하마석(下馬石: 말을 타고 내릴때 디딤돌 역할)이다.
일반 하마석과는 다르게 화려하게 무늬도 있다. 후궁의 사당인 점을 감안한 모양인데... 하지만 원래 이곳은 말을 타고 들어올 수 없는 곳이므로 하마석이 필요한 장소는 아니다. 아마도 교육적인 목적으로 갖다놓은 듯하다.

 

 

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재실에 있는 현액으로 이름이 너무 운치 있어 재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송과 죽은 소나무와 대나무로 사철 변하지 않는 절개를 뜻하며, 송죽재는 제사를 지내러 온 관원들이 묵었던 방이다.
오른쪽의 풍월헌은 바람과 달처럼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라는 의미이며, 육상궁을 지키는 관원들이 거처했던 방이기도 하다.
풍월헌은 영조가 이곳에 행차했을 때 국정을 논의했던 방이라고도 한다.

 

 

육상궁 권역이다, 보이는 현액은 연호궁(延祜宮)이지만 비밀이 숨어있다.
우선 연호궁은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진종(추존왕 追尊王)의 어머니 정빈이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 추존왕: 실제로 제위에 오르진 못했지만, 사후에 왕으로 추대되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명예회복 차원이며 대체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아버지나 형제에게 예우 차원에서 추존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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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궁 현액 안쪽으로 영조(英祖)의 친필로 알려진 육상묘(毓祥廟) 현액이 걸려있으며, 영조의 효심을 알 수 있다. 어머니 숙빈 최씨가 왕비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종묘에 신주를 모실 수 없는 안타까움에 이곳에 숙빈묘라는 사당을 세웠으며, 이후 육상묘로 부르다가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하였고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후궁들의 사당이 이곳으로 합사되면서 지금의 칠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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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천정(冷泉亭), 냉천정 현액에도 어필이 들어가 있다고 한다.
영조가 어머니 제사 때 머무르며 재계(齋戒)하고 정성을 다해 제사를 준비한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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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천정 앞뜰

 

 

냉천(冷泉), 냉천정 뒤편에 있는 우물이며 차가운 샘이란 뜻이다.
우물 벽면 상단에 영조의 친필(1727, 영조3년) 冷泉과 오언절구(五言絶句 : 오언시) 각자(刻字)가 있다.

御墨雲翰(어묵운한) 임금이 글을 새기다.
昔年靈隱中(석년영은중) 옛적에는 영은에 있었고
今日此亭內(금일차정내) 오늘은 이 정자 안에 있네.
雙手弄淸漪(쌍수농청의) 두 손으로 맑은 물 어루만지니
冷泉自可愛(냉천자가애) 냉천이 절로 사랑스럽네.
時强圉協洽?月上浣也(시강어협흡병월상완야) 정미(1727년) 3월 초순.

영은(靈隱)은 중국의 유명한 경승지인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서쪽에 있는 영은산을 말한다.
항주의 지사(知事)로 부임한 소동파(蘇東坡)가 이 산의 냉천정(冷泉亭)에서 많은 시를 지었다.

 

 

서쪽 담장 안으로 덕안궁(德安宮),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권역이다.

 

 

덕안궁(德安宮)은 고종(高宗)의 후궁이며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929년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궁이기도 하다. 생전에 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사재를 털어가며 한국 근대교육에 지대한 역할을 하신 분이다, 그러나 장티푸스로 고생하다 1911년 7월 20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경운궁 함녕전에서 운명하셨다.
장지는 청량리 영휘원(永徽園)이며 공교롭게도 할머니(엄귀비)와 손자(이진)가 나란히 마주하며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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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경궁(儲慶宮)에서 저경(儲慶)이란 '경사스러움을 쌓거나 이어감'을 뜻한다. 저경궁은 선조(宣祖)의 후궁이며 추존한 임금 원종(元宗: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의 아버지)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당이다.
저경궁은 칠궁에선 가장 선배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 최초로 왕을 탄생시킨 첫 번째 후궁이다.
물론 그 윗대에 창빈 안씨가 있지만 선조의 할머니이므로 예외다.
그래서 예우차원인지는 몰라도 가장 상석인 보는 방향의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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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궁(大嬪宮), 희빈 장씨(禧嬪張氏),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입지전적인 여인 장희빈(張禧嬪)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경종(景宗)의 어머니, 어린 나이에 궁녀로 입궁해 중궁전 안주인까지 올랐으나 처세(處世)에 문제를 드러내며 결국 43세에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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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궁(景祐宮), 선희궁(宣禧宮),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 장조(莊祖)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 경우궁은 정조(正祖)의 후궁이자 순조(純祖)의 생모 수빈박씨(綏嬪朴氏)의 사당이다.
그런데 육상궁과 연호궁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합사라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선희궁과 경우궁은 왜 합사를 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다. 예산을 아끼려고 그런걸까?! 시원한 답이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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