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 장씨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년? ~ 1701년 음력 10월 10일)는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이자 왕비로, 제20대 왕 경종(景宗)의 어머니이다. 본명은 옥정(玉貞)으로 전하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아버지는 역관 출신인 장형(張炯)이고 어머니는 장형의 첩실인 윤씨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으로서, 흔히 장희빈(張禧嬪)으로 불린다.
생애<편집>
입궐과 출궁<편집>
옥정이 몸을 의탁하고 있던 종숙부인 장현(張炫)이 경신환국에 휘말려 죽은 이후 가세가 기울자, 장옥정은 서인들과 권력투쟁을 벌이던 남인들의 입궁 제의를 받아 궁녀로 입궐하여 남인들의 후견자 자의대비(장렬왕후, 인조의 계비)를 웃전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때 장옥정은 인경왕후 김씨와 사별한 20세의 청년 숙종과 연을 맺고 정인이 되었다. 하지만 서인의 대표 격으로, 숙종의 어머니였던 대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는 남인이 입궁시킨 장희빈을 싫어해 궁에서 쫓아내었다. 이에 자의대비가 인조의 다섯째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에게 부탁해
갈 곳이 없는 신세는 면하였다.
기사환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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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 현렬왕대비(명성왕후)가 42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는 숙종과 인현왕후를 설득하여 장옥정을 재입궐시킨다.
장옥정이 남인이라는 것을 아는 서인들은 장옥정의 삼촌 장현을 비난하면서까지 격렬히 반대했지만, 숙종은 장옥정을 내명부 종 4품 숙원의 후궁으로 봉하여 신분을 보장해 주었고 창경궁의 취선당(就善堂)을 처소로 내주었다.
남인인 숙원 장씨는 서인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대립하였는데, 인현왕후는 기본적으로 장 숙원을 후덕한 성품으로 감쌌으나 교만한 숙원의 훈계를 위해 회초리를 드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1688년 당시 소의(昭儀 ; 내명부 정2품)였던 장옥정은 드디어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장남 ‘윤’(昀)을 낳았고, 이 왕자가 후에 조선 왕조 제20대 왕 경종(景宗)에 오르게 된다. 숙종은 크게 기뻐하여 소의 장씨의 품계를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키고 아들인 왕자를 원자(元子)로 책봉하려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 당시 집권을 잡고 있던 서인이 지지하지 않으므로 남인의 원조를 얻어 책봉하려 하였다. 이에 서인의 노론과 소론은 모두 아직 왕비 민씨(閔氏)가 나이가 많지 않으니 후일을 기다리자고 주장하였다. 숙종은 듣지 아니하고 1689년(숙종 15년) 정월에 원자를 봉하고 장소의를 희빈(禧嬪)으로 봉했다.
한편, 서인 세력은 남인인 희빈의 아들이 원자, 나아가 세자가 되었을 때의 후일을 염려해, 책봉을 극렬 반대하고 나섰으나, 그러나 이러한 서인들의 반대는 오히려 서인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던 숙종의 진노를 샀다. 이때 송시열이 세자를 봉함이 아직 빠르다고 상소하니 왕은 이미 명호(名號)가 결정된 다음에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은 무슨 일이냐고 분노하자,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이 송시열의 상소에 논박하며, 파직시켜 제주도로 유배하게 하고 다시 사사케 하였으나 중로 정읍(井邑)으로 이배되었다가 사약을 받았다.
이밖에 서인의 영수들도 파직 또는 유배를 면치 못하였고, 반면에 남인의 권대운(權大運)·김덕원(金德遠) 등이 등용되었다. 이로써 경신대출척 이후 밀려난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고, 이 정권 교체 사건을 기사환국이라고 한다.
곧, 환국의 여파로, 이해 음력 5월에 다시 민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으려 할 때 서인 오두인(吳斗寅)·박태보 등 80여 명이 상소하여 이를 반대하였으나 도리어 참혹한 형문을 받게 되니 이후 정국은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얼마 후, 중전 장씨의 아들인 원자는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장비(張妃)의 부모인 장형(張炯)과 윤씨, 장형의 정실 고씨는 각각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되었고, 장비(張妃)의 오빠인 장희재는 포도대장, 총융사, 한성부 좌윤 등 고관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갑술환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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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 후 시간이 감에 따라 숙종은 김만중이 자신이 폐비 사건의 옳지 못함을 깨우치기 위해 쓴 '사씨남정기'라는 소설을 읽고 결국 폐비 사건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9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요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폐비에 대한 반성으로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내렸는데, 이것을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또한 이미 죽은 송시열·김수항 등은 다시 복작(復爵)되고, 남인은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소론이 들어서고 남인이 물러나게 될 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희빈에게 보낸 서장(書狀) 속에 폐비 민씨에 관련된 문구가 논쟁이 되어 여러 사람이 장희재를 죽이자고 하였으나, 세자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하여 남구만·윤지완 등이 용서하게 하였다. 결국 장희재는 제주도로 유배를 갔고, 장옥정의 부모인 장형과 윤씨·고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호를 박탈당했다. 희빈의 처소 또한 대조전이 아닌, 과거에 사용하던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겨졌다.
무고의 옥<편집>
1701년 음력 8월 14일에 인현왕후가 사망하였다.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가 희빈이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신당을 왕에게 고하였고, 마침내 희빈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이때 장희빈은 취선당 서쪽에다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민씨가 죽기를 기도했다고 한다.
이 일로 장희재는 처형되었고, 취선당의 궁인(宮人)·무녀(巫女)등도 참형에 처해진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巫蠱-獄, 여기서 무고란 무술 (巫術)이나 방술 따위로 남을 저주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이라 하는데, 이때에 희빈의 처우에 대해 관대하게 처우하자는 당시 영의정인 최석정은 부처되고, 같은 이유로 남구만·유상헌(柳尙憲) 등 소론의 선비들도 몰락하게 되고 다시 노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어(嬪御: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장희빈이 사사된 때는 1701년 음력 10월 10일의 일로, 향년 43세였다. 그러나<숙종실록>과<연려실기술>과의 장희빈의 죽음 묘사가 달라서 (연려실기술이나 인현왕후전에는 사사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숙종실록에는 자진했다고 씌여져 있다) 장희빈이 사사되었는지, 자진했는지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하다.
사후<편집>
훗날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즉위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에 추존하였다. 왕의 생모이고 이미 5년간 중전의 자리에 있었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있었으나 경종이 연산군의 전철을 밟을 것이 염려가 되었고 또한 숙종이 사약을 받고 죽은 죄인인 그녀에 대한 발언을 일체 금지하였으며 후궁 출신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엄명을 내렸기에 왕후로 추존될 수 없었다.
무덤은 서오릉 경내의 대빈묘(大嬪墓)로, 60년대 도시화개발로 옮겨졌다. 그녀의 사당은 칠궁의 하나인 대빈궁(大嬪宮)이며, 궁정동 칠궁 경내에 존재하고 있다. 대빈궁은 왕가에서만 사용하는 원형 기둥 등의 양식을 보이는데, 이는 희빈이 한때나마 국모의 위(位)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타<편집>
그녀는 한때 조사석의 딸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조사석과 내연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녀는 역관 장현의 종질녀로만 기록되어 있고, 아버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 장형은 희빈 장씨가 어릴 때 사망했다.
▶ 희빈 장씨<위키백과>
대빈 묘(장희빈 묘)

조선 제19대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묘이다. 희빈 장씨는 어려서 나인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후 숙원이 되었다가 1688년 왕자 윤(훗날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왕자 윤이 송시열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원자로 책봉됨에 따라 정1품 희빈에 책봉되었다. 이후 궁중 암투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원자 윤이 세자로 책봉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인현왕후를 무고했다는 서인의 탄핵으로 사약을 받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사건 이후 숙종은 빈이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장희빈의 묘는 본래 경기도 광주 오포면 문형리에 있었으나, 1969년 서오릉으로 옮겨졌다.
※ 서오릉: 숙종의 능인 명릉을 비롯하여 경릉, 창릉, 익릉, 홍릉을 서오릉이라고 하며,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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