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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흐른다/한국고전

비가 오면 '陵'이 '墓'로 바뀌는 마술 같은 김유신 장군 묘비석

by 東以 2008. 10. 29.


비가 오면 '陵'이 '墓'로 바뀌는 마술 같은 김유신 장군 묘비석

 

 

 

 

송화산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지름은 30m 정도이며 주위에 호석과 난간을 두른 원형분묘로 호석에는 12지신상이 조각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옥돌이 난다는 남산과 더불어 경주 시민이 가장 즐겨 찾는 등산로이며 산책로이다. 이 묘를 거쳐 옥녀봉으로 이르는 등산로와 묘소 앞을 돌아 신라의 적석고분실, 고무신시비 등을 보면서 걷는 숲길 산책로는 정말 일품이다.

 

 

 

 

김유신장군의 묘 앞에는 좌우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 보고 있다. 김유신 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극진히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 묘비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좌측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崇禎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있어 조선중엽에 세웠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숙종 36년에 당시 경주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웠다.
우측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라고 적혀있다.

 

 

좌측의 묘비

 

 

 

우측의 묘비

 

문제의 묘비는 바로 위 우측의 묘비로 비나 물에 젖으면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의
마지막 '릉(陵)'자 위에 검은색으로 '묘(墓)"자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陵(릉)'자 위에 겹쳐 드러나는 '墓(묘)'

 

 

 

 

평소 맑은 날에는 이상이 없다.

 

 

 

 

이 글씨가 물에 젖으면 아래처럼 된다

 

 

 

 

비나 물에 젖으면 음각으로 새겨진 '릉'자 위에 '묘'자가 먹물로 쓴듯이
검은색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며 맑은 날에는 '릉'자로만 보인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현싱이 일어나는 것일까?

 

 

 

 

陵'자 위에 까맣게 드러난 '墓'자

 

'릉'자 부분에 '묘'를 새겨 파내고, 파낸 부분에 돌가루로 채웠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포샵으로 재현해보자

 

 

 

1. 본래의 비석

 

 

 

 

2. '릉'자 위에 '묘'자를 쓴다

 

 

 

 

3. 쓴 부분(흰부분)을 파낸다

 

 

 

 

4. 돌가루를 채워 넣는다

 

 

 

 

5. 조각한 형태를 옆에서 보면

 

 

 

 

글씨 전체를 파내고 '릉'자의 오목하게 음각된 부분은 더 깊게 파서 돌가루를 채워넣었다.
위의 그림에서 회색 부분이 돌가루를 채워넣은 부분이다.

그럼 홈을 채워넣은 물질은 무엇일까?

마른 상태의 색깔은 대리석과 거의 흡사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처음엔 시멘트를 섞은 몰타르가 아닐까 했는데 자세히 보니 시멘트는 아니다.
시멘트는 물이 묻어도 이렇게 진하게 변하지는 않는다.

아마 물에 젖으면 아주 진하게 색이 변하는 특수한 성질의 돌을 가루로 만들어 접착제와 혼합한 것으로 보인다.

 

 

 

 

원 안을 자세히 보면 파내고 다른 물질을 메운 흔적이 있는데 쉽게 구분이 안 된다

 

 

문화재 해설사의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왕이 아니었기에 묘로 고쳤다고 하는데 신빙성이 없다.
왜냐면 이 비석은 1970년대 김유신장군묘 재정비 때 만들어진 비석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이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맑은 날 한 컵의 물만 부어도 확연하게 '墓'자가 드러나는 마술 같은 비석이다.

 

 

 

 

 



 

 

<2008년 8월 4일자 연합뉴스>

 

김유신 묘비 '陵'-'墓' 겹쳐 보이는 이유는

 

 

 

'릉(陵)과 묘(墓)가 겹치네' (경주=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사적 제21호인 경북 경주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비석 끝 글자에 릉(陵)과 묘(墓) 자가 겹쳐진 상태로 보이고 있다(왼쪽). 비석에 물이 스며들면 '묘'자는 더욱 선명해진다(오른쪽). haru@yna.co.kr

 

 

(경주=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사적 제21호인 경북 경주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비석 끝 글자에 릉(陵)과 묘(墓) 자가 겹쳐진 상태로 보여 그 이유에 대한 궁긍증을 자아내고 있다.

4일 경주시에 따르면 김유신 장군 묘에는 정면에 1710년께 세운 비석이 있고 묘를 마주 보고 오른쪽에는 1930년대 후손들이 만든 비석이 서 있는데 오른쪽 비석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비석의 비문은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릉'과 '묘'라는 한자가 같은 위치에 드러나 있다. 특히 비석에 물이 스며들 경우 두 글자 가운데 '묘' 자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문중에서는 "오래전에 비석을 세운 데다 관리도 경주시에서 하고 있어 명확한 이유에 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 "그러나 김유신 장군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사실을 모르고 '묘'자를 새겼다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그 자리를 돌가루로 메우고 '릉'자를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문중에서는 '묘'자를 메우는데 사용된 돌가루가 비석의 돌과 다른 성분이어서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를 드러냈고 물기가 스며들면 더욱 선명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 장군은 세상을 떠난 이후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됐다.

 

 

 

 

 



 

 

<2008년 8월 4일자 한국일보>

 

비가 오면 왕릉이 왕묘로?

 

 

70년대 만든 김유신 장군 묘비석 글자 변신 화제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사적 제21호 김유신장군묘의 묘비석 글자가 비에 젖을 경우 왕릉(王陵)에서 왕묘(王墓)로 변해 눈길을 끌고 있다. 김유신장군묘 정면에는 조선시대 때 세운 비석이, 오른쪽에는 70년대 사적지를 정비하면서 새로 세운 비석이 서 있는데 글자가 변하는 것은 바로 오른쪽 비석이다. 비만 오면 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이라는 비문의 끝 글자 '릉'이 검은 색의 '묘'자로 탈바꿈한다.

 

비가 오면 '릉'자가 '묘'자로 변하는 경주의 김유신장군묘


최근 김유신장군묘를 관람한 김모(41ㆍ경기 성남시)씨는 "비문을 살펴보다가 소나기가 내려 잠시 비를 피한 뒤 다시 와 보니 '릉'자가 '묘'자로 바뀌어 놀랐다"고 말했다.

비문을 살펴 본 조각가 김진헌씨는"먼저 '릉'자를 새기고, 그 위에 '묘'자를 새겼다 '묘'자 부분을 다시 돌가루로 채운 것 같다"면서 "그러나 비가 올 경우 특수 접착제가 섞인 이 돌가루가 검게 변하면서 '묘'자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지역 사학계에서는 신라 왕족이 아니면서 왕의 칭호를 받은 김유신장군을 비하하기 위해 70년대 당시 비석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이나 이후에 누군가가 새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신라문화유산조사단 김호상 박사는"오래 전 일이어서 비문이 변조된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가야왕실의 후손으로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은 사망(673년) 160여년 뒤(835년)인 흥덕왕 때 '흥무왕'으로 추봉돼 왕과 왕후에게만 사용하는 '릉'자를 비석에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주=김경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