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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흐른다/한국고전

칠궁(육상궁) (下)

by 東以 2013. 4. 21.

대빈궁 권역

 

덕안궁 뒤편의 모습이며 좌측으로부터, 저경궁(儲慶宮), 대빈궁(大嬪宮), 경우궁(景祐宮)과 선희궁(宣禧宮)은 합사되어 있다.
이렇게 세 개의 사당이 한 개의 월대 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저경궁(儲慶宮)

 

저경궁에서 저경(儲慶)이란 '경사스러움을 쌓거나 이어감'을 뜻한다. 저경궁은 선조(宣祖)의 후궁이며 추존한 임금 원종(元宗: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의 아버지)의 생모인 인빈 김씨(仁嬪金氏)의 신위(神位)를 봉안(奉安)한 사당이다.

저경궁은 칠궁에선 가장 선배이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선 최초로 왕을 탄생시킨 첫 번째 후궁이다.
물론 그 윗대에 창빈 안씨가 있지만 선조의 할머니이므로 예외다.
그래서 예우차원인지는 몰라도 가장 상석인 보는 방향의 좌측에 자리 잡고 있다.

인빈 김씨는 선조의 후궁으로 원래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수발을 들던 나인이었다가 인순왕후의 추천을 받아 14세에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간택 후궁이 아닌 승은 후궁으로 입지는 그다지 좋지 못했지만 선조의 총애로 후궁 중에선 가장 많은 9명의 자식을 출산하였다. 그 중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인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면서 최초의 후궁출신 왕 배출이란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인조가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무리하게 올린 추존이지만 정원군이 왕이면 지나가는 개도 왕이 될 정도로 실상 정원군은 패륜아였다.
공빈 김씨의 소생이자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보다야 레벨이 떨어지지만 순화군과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개차반 망나니였다.
뭐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랄까? 부전자전(父傳子傳)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그녀에 대한 평은 일단 매우 우호적이지만 그녀의 동생인 김공량은 이산해와 결탁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서 악의 축을 담당했을 정도로 악행을 일삼았는데 반대로 보자면 공빈의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음이다.

아들 중에 선조가 가장 총애했다는 신성군이 있었으나 임란 중에 죽고, 시선이 광해군(光海君)에게 쏠리자 모든 걸 내려놓고 광해군에게 철썩 달라붙어 복종하였다고 하는데 그 결과 광해군 즉위 후 인빈의 가족이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는 해석도 볼 수 있다.
당의통략(黨議通略)엔 조정의 신하들이 광해군에게 힘을 실어 주는 분위기가 생기자 선조를 붙잡고 우리 모자를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다는 기록도 볼 수 있다. (이 사건으로 정철은 유배당함)

당시 의인왕후는 살아있는 시체나 다름없었고 궐내 실세였던 공빈이 있었는데 공빈 김씨가 죽자 모든 권세가 인빈에게 돌아왔다.
인빈은 그렇게 위세를 떨치며 40년 동안 선조에게 사랑을 받고 선조가 죽자 사가로 돌아가 치장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미천한 궁녀 출신이자 승은 후궁 출신인지라 말 많았던 신성군 세자 문제는 고려대상에서 제외됐었다.

지금의 인빈이란 칭호는 인조 때 추증해 준 것이고 영조 31년(1755년)이 되서야 인빈의 위패를 원종의 잠저인 송현궁에 모시고 이름을 저경궁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지금의 저경궁은 순종 2년 (190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으며 당시 남대문로 3가에 있던 저경궁은 1927년 철거되고 지금은 하마비(下馬碑)만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능은 남양주에 있는 순강원(順康園)이다.

 

 

대빈궁(大嬪宮)

 

대빈궁(大嬪宮)은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경종(景宗)의 생모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여인 중의 한 명인 희빈 장씨(禧嬪 張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이 대빈궁은 다른 사당들과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일단 기단이 한 단 더 높이 지어졌으며 정당에 올라가는 계단도 총 5단으로 높은 걸 볼 수 있다. 또한 문살도 다른 궁은 한 단인 데 비해 2단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장 중요한 건 서까래를 바치고 있는 안 기둥이나 바깥 기둥이 왕실을 상징하는 원주(원통형 기둥) 기둥이라는 점이다.
이렇듯 칠궁 내에서 한때나마 유일하게 왕후의 자리에 올랐던 여인이라 사후 사당만이라도 이렇게 극진히 예우해준 것 같다.

희빈 장씨의 굴곡진 인생은 당쟁과 맞물려 한국 조선사에 자주 거론될 정도로 뜨거운 감자였으며 궁중문학인 '인현왕후전'이나 '사씨남정기' 등, 생전이나 생후에도 문학으로 회자될 만큼 사극 최고의 단골 소재로 드라마 및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작될 궁중 암투극의 일인자로 평생 공로상을 받아 마땅한 인물이다.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사실 두말하면 잔소리처럼 들리기에 오히려 뭘 소개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으나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그냥 지나치기엔 너무 아쉽고 미련이 남을 것 같아 살짝 간이라도 보고 넘어가야겠다.

희빈 장씨의 본명은 장옥정(張玉貞)이며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부유한 역관(譯官) 집안 출신으로 중인이다. 때문에 관비(공노비)만 뽑아 쓸 수 있는 궁녀 제도에 따라 굳이 궁녀가 되지 않아도 되었으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몰락하는 집안을 일으키고자 남인(南人)과 정치적인 타협을 하고 자의대비전 궁녀로 입궁하게 되었다.

야사에 전하는 바로는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으나 풍만한 몸매에 교태가 넘치고 아양이 뛰어났다고 하며, 때문에 자의대비의 총애는 받았으나 서인(西人)의 지지자였던 현종비 명성왕후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 무렵 마침 숙종의 정비였던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숙종의 눈에 띄었다고 하는데 먼저 꼬리를 쳤을 가능성이 크다.

한때 젊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옥정은 그 사실이 발각되어 궁에서 쫓겨났지만 자의대비와 계속 연을 맺었으며 명성왕후가 승하하자 자의대비가 인현왕후에게 양해를 구해 재입궐 시켰으며 서인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 숙종은 그녀를 종4품인 숙원(淑媛)에 봉한다. 이로써 옥정은 후궁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게 파란만장한 그녀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숙종은 창경궁(昌慶宮)에 취선당(就善堂)까지 마련해주고 틈만 나면 찾을 정도로 옥정에게 빠져도 너무~ 빠져있었다.
그렇게 숙종을 치마폭에 휘감고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권력에도 관심을 보이며 서인이었던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와 정치적이나 사적으로도 대립하게 되었다. 평소 어질고 현숙했던 인현왕후는 옥정의 오만방자한 행동을 늘 다독이며 감싸 안았으나 오죽했는지 그 얌전하던 인현왕후도 옥정에게 회초리를 들 때가 많았다고 한다. 마치 문정왕후와 경빈 박씨의 재림이었으나 뒤로 갈수록 주객이 전도된다.

1688년 소의가 된 옥정은 인현왕후가 마땅히 해야 할 왕자 생산을 비웃기라도 하듯 왕자 '윤(昀)'을 낳았고 덩달아 품계도 정1품인 희빈(禧嬪)에 봉해져 비로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장희빈이란 별호를 얻는다. 이때 낳은 왕자가 훗날의 경종이며,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삼으려는 자신의 결정을 거세게 반대한 괘씸죄로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린다.【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누구인가? 숙종의 할아버지 효종(孝宗)과 아버지 현종(顯宗)도 눈치를 살폈을 정도로 정치계와 사상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거물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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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까지 연상하게 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조선 후기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었던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자(子)’자를 붙인 유일한 인물로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일명【송자대전(宋子大全)】을 남겼다.


가문과 일생

송시열은 은진(恩津) 송씨로 그의 가문은 역대로 충남 회덕이 세거지였다. 아버지는 송갑조(宋甲祚)이며 어머니는 선산 곽씨이다. 그의 집안이 회덕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9대조인 송명의(宋明誼)가 회덕으로 장가들면서부터다. 그 후손들은 이후 회덕 백달촌에 송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을 송촌(宋村, 현재 대전시 동구 중리동)이라 불렀다. 백달촌은 산이 높고 물이 깊으며 흙이 비옥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었다.

은진 송씨가 회송(懷宋)이라고 불릴 만큼 지역사회에 깊은 연고를 가지게 된 것은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8-1446)부터이다. 1432년(세종 14년)에 송유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백달촌에 쌍청당을 짓고 살았는데, 뜻을 받든 후손들이 쌍청당을 정성껏 지켜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진 송씨 집안은 송유 이후 크게 현달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벼슬길이 완전히 끊긴 것도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은진 송씨 가문은 송규연, 송규렴, 송상기, 송준길, 송구수, 송시열 등 뛰어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송시열은 외가가 있는 옥천 적등강가 구룡촌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선산 곽씨 집안은 옥천에 세거지가 있었으며, 외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조헌과 함께 목숨을 바친 의병장 곽자방이다. 우암을 낳을 때 어머니 곽씨는 명월주를 삼키는 태몽을 꾸었고 부친은 공자가 여러 제자들을 거느리고 집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이름인 성뢰(聖賚)는 부친이 꾼 태몽에 따른 것이다.

송시열이 친가가 있는 회덕으로 간 것은 여덟 살 되는 1614년이다. 이 때 친족인 송이창 집에서 송이창의 아들이자 쌍청당의 7대손인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함께 수학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부터는 아버지 송갑조에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은 송시열의 성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부친 송갑조는 광해군 시절, 사마시에 함께 합격한 이들이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에 인사하지 않겠다는 것에 반발하여 홀로 서궁에 찾아가 절을 할 정도로 대쪽 같은 인물이었다. 이 일로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어 고향으로 낙향하였고, 그 뒤로 두문불출하며 학문과 아들 교육에만 전념했다. 송시열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주자율곡이었다. 그렇게 된 데는 부친의 영향이 컸다. 송갑조는 송시열이 열두 살 때 “주자는 훗날의 공자다. 율곡은 훗날의 주자다. 공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며 주자와 이이, 조광조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쳤다.

1625년(인조 3년) 송시열은 19세의 나이로 도사 이덕사의 딸 한산 이씨와 혼인하였는데, 이씨는 문정공 목은 이색의 후손이다. 1627년 이후 송시열은 연이은 큰 슬픔을 당하게 된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일어나 그만 맏형인 송시희가 운산에서 전사했고, 22세인 1628년에는 부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을 마친 뒤인 1630년에 송시열은 율곡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해 율곡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고, 이듬해 김장생이 죽자 그 아들 김집(金集)의 문하에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년)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시제(試製)로 논술하여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곧바로 사직하고 송준길과 영남을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1635년 11월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의 사부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년간에 걸친 사부 생활은 효종과의 깊은 유대와 함께 북벌계획을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에게 북벌을 당부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비극은 송시열의 전 생애에 걸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절친한 동문인 윤선거(尹宣擧)와도 갈등을 빚었고, 윤선거의 아들이면서도 그가 총애한 제자 윤증과도 결별함으로써 노론과 소론의 분쟁도 일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되자 송시열은 관직 생활의 뜻을 접고 충북 황간으로 낙향하여 한천정사(寒泉精舍)를 짓고 북벌계획을 구상하며 강학에 힘을 기울였다. 낙향한 그를 인조가 여러 차례 불렀지만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인조의 계속적인 부름에 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모양새로는 그가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경세(經世)에 뜻이 없는 인물은 아니었다.

송시열의 나이 43세인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은 대군으로 있을 때 사부였다는 인연으로 송시열을 불러 곁에 두고 싶어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 병자호란으로 중국 심양에서 인질생활을 몸소 겪은 왕이었다. 효종은 즉위하면서 재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던 산림(山林)들을 대거 중앙 정계에 등용하고자 했고, 대표적인 인물이 스승인 송시열이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국가 원로들을 궁궐로 초빙했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기 위해 와신상담할 것을 밝혔다. 화답이라도 하듯이 송시열은 1649년 [기축봉사(己丑封事)]를 올려 북벌론의 합당함을 제시하고 북벌이야말로 국가 대의라는 것을 표방하였다.

[기축봉사]는 밀봉한 채로 효종에게 바쳐졌다. 모두 13개조로 되어 있는 이 봉사에서 송시열은 ‘대일통(大一通)’의 큰 뜻을 밝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내용이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 조목은 ‘슬픔을 절제하여 몸을 보호할 것(節哀以保身)부터 정사를 바르게 하여 오랑캐를 맞설 것(修政事以禦外侮)’에 이르기까지 군왕으로서 지켜야할 내용들이었다. 물론 여기서 오랑캐란 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송시열에게 중국의 주인은 여전히 청이 아닌 명이었다. 청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현실인식은 송시열에게는 패륜이자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송시열은 현실로 굳어진 국제관계를 무시하고 유교적인 가르침대로 명을 위해 복수해줄 것을 당부하고자 했다.

송시열에 대한 효종의 대우는 지극했다. 왕이 청에 대한 북벌을 계획할 때면 사관이나 승지마저 멀리한 채, 독대로 의논할 정도였다. 효종의 총애를 받은 송시열이지만, 인조에게 그랬던 것처럼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다. 표면적인 이유는 70이 넘은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예의와 염치가 없는 무리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조정에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효종은 거듭해서 송시열에게 관직을 내렸고 송시열은 그때마다 사양했다. 효종의 끊임없는 구애는 계속되었다. 효종 9년(1658년) 2월에 송시열이 부름에 응하지 않자 효종은 “봄이 와서 날이 풀리면 올라오라고 했는데 송시열이 오지 않는 것이 청나라 사신이 온다는 소식을 들어서인가”라며 걱정했다. 결국 그해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송시열은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2월에는 북벌 때 입으라며 초구(담비로 만든 털옷)를 직접 하사할 정도로 효종은 그를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러나 효종은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급서(急逝)했다. 송시열이 조정의 대신으로 효종과 국사를 의논한 기간은 너무 짧았고, 서인의 영수로서 정치적 부침이 시작되었다.


화양동 생활과 제자 윤증과의 불화

송시열은 주자(朱子)를 신앙으로 삼을 정도로 ‘주자제일주의자’였다. 송시열이 항상 주자를 입버릇처럼 되내이자, 효종이 “경은 말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며, 일마다 옳은 이가 주자이십니다”라고 답변할 정도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주자의 남송시대가 자신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믿은 인물이었다. 내우외환이라는 주자가 당면했던 문제가 조선의 당면 문제와 유사한 것으로 보았고, 그로 인해 주자가 제시했던 대책은 지금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했다.

조선이 건국된 상황은 송(宋)과 똑같기 때문에 그 말류(末流)의 폐단 또한 서로 비슷합니다. 국력의 강하고 약함도 비슷하고 지방 관리들의 부패도 비슷하며, 호강(豪强)한 자가 제맘대로 난폭하게 구는 것도 비슷합니다. 주자는 당시에 눈으로 이런 것들을 보았으므로, 말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정성스러워 그 병에 꼭 들어맞는 처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병을 치료하고자 한다면, 이 약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숙종실록] 권 14, 숙종 9년 6월 경자일>

송시열은 유학의 정맥이 윤휴 등에 의하여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생각했고, 주자의 학설을 비판한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았다. 윤휴에 대한 송시열의 반감은 훗날 그가 총애하던 제자 윤증과 불화하는 이른바 회니시비라는 노소분당으로까지 비화되었다. 회덕에 살던 송시열과 니산(尼山)에 살던 윤증은 사제지간이었고, 윤증의 부친인 윤선거는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생전에 율곡의 연보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윤선거가 윤휴의 논지를 인정하는 뜻을 비춘 적이 있었는데, 윤선거는 송시열과 윤증 사이를 원만하게 이끌려는 것이었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윤휴를 두둔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 때 가족을 이끌고 강화도에 피난해 있었는데, 강화가 함락되려 하자 부인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순절하였다. 이때 윤선거는 부친 윤황을 만나기 위해 강화도를 탈출하였고, 부득불 혼자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긴 윤선거는 폐인을 자처하며 벼슬길을 사양하고 재혼도 하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했다. 윤선거가 1669년 6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그의 아들 윤증은 박세채가 써준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을 써줄 것을 부탁했다. 윤증의 부탁을 받은 송시열은 마지못해 ‘박세채가 윤선거를 칭송하는데 나는 박세채를 믿으니 그의 말을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고 했다. 박세채의 말을 인용하되(述而), 윤선거를 칭송하는 글을 쓰지 않겠다(不作)는 말이었다. 송시열은 묘갈명을 지어 윤선거를 칭송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몇 차례에 걸친 윤증의 간곡한 부탁에도 송시열은 글자 몇 자만 고칠 뿐이었다. 윤선거의 묘갈명을 계기로 스승인 송시열과 제자 윤증의 사이는 멀어져 갔다.


영욕의 삶

효종의 스승으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던 송시열이지만, 효종의 죽음과 함께 영욕의 삶도 저물어갔다. 1660년 송시열은 효종의 장지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았고,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감으로 벼슬을 버리고 화양동으로 은거했다. 1666년 8월에 화양동으로 거주지를 옮긴 송시열은 이후 1688년까지 화양동을 출입하며 산수를 즐겼고, 강학을 하며 제자들을 길렀다. 화양동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뒤에도 1668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좌의정 허적과의 불화로 사직하였고, 1674년 2월 효종비 인선왕후의 복제문제로 실각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듬해 송시열은 유배되었다가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지 석방되었다.

송시열의 나이 76세 되던 1682년에 김석주 등 훈척들이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 하려는 작업을 했다. 이 때 송시열이 주동자 중의 한명인 김익훈을 두둔했는데, 김익훈은 스승인 김장생의 손자였다. 실망한 젊은 선비들은 송시열을 비난했고, 제자인 윤증과도 반목이 더욱 심해졌다. 이 일로 송시열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 화양동으로 다시 은거하였다.

송시열의 나이 83세인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훗날의 경종)을 낳자 원자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송시열은 왕세자가 책봉되자 시기상조라며 반대하다가 결국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송시열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지 못하고 서울로 압송되던 중, 사약을 내리려고 오던 금부도사 행렬과 6월 3일 정읍에서 마주쳤다. 송시열은 사약 두 사발을 자진하여 마시고는 영욕이 교차하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이때 자손에게 남긴 친필유서가 아직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붓으로 세상을 움직인 노론의 영수, 신화가 되다.

송시열은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개개인마다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그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조선왕조실록】에 3천 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인물.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그의 죽음은 신념을 위한 순교로 이해되었고, 그의 이념을 계승한 제자들에 의해 조선사회는 움직였다.

송시열과 관련한 대표적인 지역을 꼽으라면 ‘화양동’일 것이다. 1803년 가을 음성현감이 된 성해응이 부친 성대중과 화양동을 답사하고 지은 [화양도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 송시열과 관련한 일화가 전한다. 우암 송시열은 태어날 때 산천의 정기를 타고 나 하루는 세자가 그의 안광을 보고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우암이 기거하던 초당에 매년 봄이 되면 활짝 만개하던 홍매(紅梅) 한그루가 있었는데 1689년 사약을 받은 해에 갑자기 말라 죽었다. 그러다가 갑술년(1694)에 경술환국으로 송시열의 관직이 회복되자 죽었던 매화가 다시 살아나 꽃을 활짝 피웠다고 전한다.

이를 계기로 조정엔 정치적 파란이 일고 남인이 정권을 휘어잡는 등 인현왕후의 입지도 통명전(通明殿)에 국한될 정도로 좁아지면서 이른바 장씨의 세상이 도래한다.
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비(廢妃) 되고, 꿈에 그리던 중궁전인 대조전(大造殿)에 입성하게 된다.
기고만장해진 장희빈은 오라비 장희재(張希載)를 고위 관직에 등용하고 부정축재를 일삼는 등 반대파 중상모략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남인들의 횡포가 심해지자 귀양살이를 하던 김만중(金萬重)이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퍼뜨렸으며 인현왕후 복위사건에 민심까지 동요하는 등 또 한 번 조정이 술렁이게 된다.

한창 위세를 부릴 당시 장안에는 해괴한 타령조 노래가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갔다.
은유와 파자(破字)를 사용해 왕실 내명부 실상을 비꼬는 참요(讖謠)로 저잣거리 장사꾼조차 그 속내를 훤히 알았다.

미나리는 사철이고 장다리는 한철이라
요사부려 오른 자리 십 년 갈까 백 년 갈까
살아생전 누린 호강 죽어서도 가져가나…

참요에는 어질고 현숙했던 인현왕후 여흥 민씨를 미나리에,
모질고 영악했던 희빈 장씨를 장다리(무·배추의 꽃줄기)에 각각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숙종은 영명하면서도 변덕이 심한 임금이었다. 대신들의 권력투쟁을 자신의 왕권 강화 방편으로 절묘하게 활용했다. 그렇게 기사환국 이후 남인을 비롯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도 시들해지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것에 대해 후회를 느낄 무렵 장희재가 장희빈에게 보낸 서장이 발견되고 장희빈과 장희재가 인현왕후를 죽이려 했다는 숙빈 최씨(淑嬪崔氏)의 고변으로 장희재는 제주로 유배되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하사되었던 옥산부원군 별호도 박탈당한다. 또한 장희빈은 취선당으로 내쳐지고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며 정권은 서인 세력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다. 이 사건으로 숙종은 희빈에게 자진(自盡)할 것을 명한다.

이것이 실록에서 전하는 희빈 장씨의 일대기이자 대략적인 요약이다. 마지막 자진하라는 명도 그렇고 확실히 실록 자료들은 왕실 이미지에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므로 역시 야사에 전하는 역사가 더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희빈 장씨 비석

 

비문에는 '유명 조선국 옥산부대빈 장씨지묘(有明 朝鮮國 玉山府大嬪 張氏之墓)'라고 쓰여 있으며, 여기서 '대(大)'는 그녀의 사후 빈호(嬪號)이다.

장씨에 대한 수문록의 기록을 보면, 선대왕(숙종)이 낮잠을 자는데 꿈에 신룡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발버둥을 치다 가까스로 머리 뿔을 드러내놓고는 울면서 말하길, '전하 속히 저를 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태몽을 직감한 숙종은 바로 희빈(당시 중전)을 찾았다고 한다. 두 차례나 아이를 낳은 전력이 있기에 (둘째 아들은 생후 10일 만에 사망) 숙종은 얼굴만 봐도 태기를 느낄 수 있었는데 전혀 낌새가 없음을 알고 그렇게 중궁전을 나오다 유독 큰 독이 눈에 띄어 '저 독은 어째 저리 거꾸로 세워두었느냐?'고 묻자 희빈이 대답하길 '빈 독은 원래 저렇게 거꾸로 세워 두옵니다'라고 답하자 눈치 빠른 숙종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환관에게 독을 바로 세워보라 했는데 그 속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숙종이 크게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얼마 전 가까이했던 나인이었으며, 그 여인이 바로 숙빈 최씨였고 임신의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평소 시기와 질투가 강하고 야망이 컸기에 인현왕후도 숙빈도 그녀에겐 인정할 수 없는 하나의 장애물이자 견제대상이었던 것이다.

장희빈은 세자의 어머니였기에 폐비 윤씨처럼 폐서인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화가 되어 취선당에서 재기를 노리며 중전을 저주하기에 이른다. 약발이 먹혔는지 마침내 1701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인현왕후와 유독 친분이 두터웠던 숙빈 최씨가 평소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사실과 취선당 서쪽에 있다는 신당을 숙종에게 고해바친다.

이때 숙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빈 최씨가 평소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했다.'
또한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원이 기록한 단암만록에도 같은 맥락의 비슷한 기록이 있다.

결국 숙종은 저주사건에 관련된 장희재를 처형하고 취선당의 궁인과, 무녀 등도 모조리 참했으며, 연루된 소론의 고위 대신들도 모두 유배형에 처했다. 이 사건을 '무고의 옥'이라 한다.
사건의 주동자인 희빈 역시 무고의 혐의로 세자를 비롯한 수많은 대소신료의 만류에도(노론 제외) 불구 사형에 처하게 된다.
분노한 숙종은 무고의 옥 사건 이후 빈어(嬪御: 임금의 첩)는 후비(后妃: 임금의 정실)가 될 수 없다는 법을 선포하기에 이르는데, 당시 숙종의 엄포를 숙종실록을 통해 보면
'이제부터 나라의 법을 제정하노니 빈어가 왕후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법령을 제정했다. (숙종실록 27년 10월 7일)
사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수많은 설이 전해지는데, 이는 모두 확인되지 않은 내용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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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빈묘(大嬪墓)

 

서오릉 한켠에 자리한 대빈묘, 살아생전 떨쳤던 위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세상 시름 모두 잊고 자연으로 돌아간 듯 평온하기만 하다. 그런데 돌아서는 발걸음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

지금의 서오릉 경내로 이장했을 때 그녀의 관에 석회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장희빈 미라 설이 제기되기도 했었다. 원래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의 시신은 잘 썩지도 않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녀의 한을 풀어줘야 할지...

희빈 장씨는 1701년 10월 10일 4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숙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명(王命)에 의한 자진이라 기록돼 있다.
사약을 마시면 피를 토하며 무척 고통스럽게 죽는다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강빈은 사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지 않고 꾹 참고 죽었다고도 한다.
이 죽음을 놓고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 그리고 '연려실기술' 등에는 몸부림을 치며 죽었다고 비교적 세세하게 기록되었으니 아무튼 사약을 받고 죽은 건 확실한 것 같다.

숙종실록이 영조 때 편찬된 것이라 위의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기 위해선 사사보단 자진이란 표현이 모양새가 좋아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원래 실록이란 게 왕실에 우호적이고 조금이라도 불리한 글은 두리뭉실하게 표현했으므로 정상참작하며 봐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링크하려 했으나 너무 방대하고 날짜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혼란의 우려가 있기에 생략한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유교의 예법 중 칠거지악을 어겨가며 권력에 지나치게 욕심을 낸 결과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든 불나방에 비유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녀가 인자하게 덕을 베풀며 살았다면 역사가 어떻게 변했을지? 경종이 어떤 정치를 펼쳤을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권불십년은 옛말이 되었고 역시 탐욕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교훈을 남긴다.

숙종은 그래도 세자의 생모인지라 그녀의 위패를 사저에 모시다가 경종 2년이 되어서야 교동 경행방에 사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대빈궁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908년 순종 2년에 지금의 육상궁 안으로 모셔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조선 최초의 후궁출신 왕후인 폐비 윤씨(제헌왕후)도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으며,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후궁출신 왕후인 희빈 장씨 역시 사약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정말 공교롭게도 빈어(嬪御)는 후비(后妃)가 될 수 없다는 숙종의 어지(御旨)와도 일치하는 대목이다.

 

 

역대 장희빈 役 배우

 

위 좌측에서부터 초대 장희빈인 김지미, 2대 남정임, 3대 윤여정, 4대 이미숙, 5대 전인화, 6대 정선경, 7대 김혜수, 8대 이소연까지
역대 장희빈 役 배우들이다.

1대 김지미
1대 장희빈은 영화 장희빈(長熺嬪)(1961년)에서 김지미가 맡았고 인현왕후는 조미령, 숙종은 김진규가 열연했다.

2대 남정임
2대 장희빈은 영화 요화 장희빈(1968년)에서 남정임이 연기했고 인현왕후는 태현실, 숙종은 신성일이 연기했다.

3대 윤여정
3대 장희빈은 MBC 장희빈(1971년)에서 윤여정이 연기했고 인현왕후는 김민정, 숙종은 박근형이 맡았다.

4대 이미숙
4대 장희빈은 MBC 여인열전(1981년)에서 이미숙이 연기했고, 인현왕후는 이혜숙, 숙종은 유인촌, 숙빈은 이미영이 연기했다.

5대 전인화
5대는 MBC 조선왕조 500년 인현왕후(1988년)에서 전인화가 열연했고 인현왕후는 박순애, 숙종은 강석우, 숙빈은 견미리가 맡았다.

6대 정선경
6대 장희빈은 SBS 장희빈(1995년)에서 정선경이 연기했고, 인현왕후는 김원희, 숙종은 임호가 연기했다. 숙빈은 남주희가 맡았다.

7대 김혜수
7대는 KBS2 장희빈(2002년)에서 김혜수가 연기했고, 인현왕후는 박선영, 숙종은 전광렬, 숙빈은 박예진이 맡았다.

8대 이소연
8대는 MBC 동이(2010년)에서 이소연이 맡았다. 이 드라마는 연기대상까지 받았으나, 장희빈은 조연이었다. 숙빈(동이)은 한효주, 인현왕후는 박하선, 숙종은 지진희가 연기했다. 참고로 '드라마 동이'는 숙빈이 주연이었으며 장희빈은 조연 정도였기에 큰 비중은 두지 않았고 권력의 희생양 쯤으로 두리뭉실하게 설정했다.

9대 김태희
9대는 SBS 장옥정, 사랑에 살다(2013년)에서 김태희가 맡았다. 인현왕후는 홍수현, 숙빈은 한승연, 숙종은 유아인이다.
4월30일 현재 8회까지 방영됐으며 안타깝게도 시청률이 한자릿수다. 김태희의 연기력과 드라마 구성 자체를 지적하는 평이 많다.
분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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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우궁(景祐宮)

 

경우궁은 정조(正祖)의 후궁이자 순조(純祖)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綏嬪朴氏)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칠궁 내에서 유일한 양인으로 간택 후궁 출신이다.
원래 혼기가 꽉 차 이웃 양반집 자제에게 시집을 가려 했었는데 혼례 하루 전날 갑작스레 내린 폭우에 수빈이 살던 마을이 쑥대밭이 되어 오갈 곳이 없게 되자 사촌 집으로 피난을 가게 됐는데 박준원의(수빈의 아버지) 사촌인 박명원이 수빈을 보자 맘에 쏙 들어 후사가 없는 정조에게 간언해 삼자 간택으로 후궁이 되었다.

평소 예절이 바르며 행실이 착할 뿐 아니라 성품이 굉장히 온화하고 검소하여 어진 후궁이란 뜻의 현빈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정조와 영춘헌에서 생활할 때 정조 역시도 비가 새는 지붕을 고치지 않고 살았었는데 수빈 역시도 일상용품조차 지극히 검소하고 의복을 짓는 나인이 작은 천조각을 버리자 크게 꾸짖을 정도로 검소하고 정조가 초대한 신하들에게 집 밥을 지어주는 등 뭐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하는 효의왕후를 위로하고 혜경궁 홍씨 등을 끝까지 봉양하여 후궁의 척도와 효부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정조가 특히나 예뻐해 처가에 내려준 선물과 편지 등도 최근 공개됐었다.

 

 

영춘헌(迎春軒)

 

정조 말년 정조와 수빈 박씨의 살림집이었던 창경궁 내에 있는 영춘헌(迎春軒)

본래 의빈 성씨가 낳은 문효세자가 있었으나 너무 일찍 요절하는 바람에 수빈 박씨가 낳은 순조가 세자가 되었다.
수빈의 아들이 세자가 되자 간사한 무리가 세를 얻고자 뇌물을 바쳤는데 수빈이 고해 모두 의금부에 끌려갔다고도 한다.
행실이 이러하니 누군들 존경하지 않고 누군들 사랑하지 않으리오.
그녀 슬하엔 순조와 옹주 하나가 있으며 의빈 성씨 이상의 사랑을 받은 후궁이라 하겠다.

가순궁은 순조 20년(1820년) 12월 숙빈의 처소였던 창덕궁 보경당에서 서거했다.
신주를 창경궁 내에 있는 전각에 봉안하여 처음에 현사궁이라 임시로 이름을 지었다가 순조 24년 1824 12월 1일 '전교하기를, 별묘의 궁호를 경우궁으로 하여라.' 라는 실록의 기록대로 경우궁으로 명명했으며 순조 25년 2월에 경우궁에 신주를 봉안하고 있다가 1908년 순종2년 역시 제사친묘 합사조치에 따라 지금의 칠궁 내로 이전 봉안되었다.

정조 11년 수빈이라는 빈호와 가순궁의 궁호를 받았으며 사후 시호는 현목으로 현목 수빈이라고도 불렸고 원호는 휘경원, 사당의 이름을 경우궁이라 정하면서 두 개의 궁호로 호칭되었다.
참고로 그녀가 잠든 휘경원의 능호를 따라 휘경동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수빈은 칠궁 내에서 유일하게 간택 후궁출신이지만 또 유일하게도 생전에 자식이 보위에 오른 걸 본 인물이다.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그렇기에 무품 빈이 되어 호칭에 애를 먹자 실제로 '저하'라고 높여 부른 적이 있다. 저하는 절대 후궁에게 붙일 수 없는 왕실의 칭호였다.
참고로 보통 대궐의 가장 높은 품계가 '전'으로 끝나는 전각인데 전하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듯이 당->합->각 등으로 이어지는 품계에 따라 합하, 각하라고 호칭했는데 세자 급이 썼던 당이란 호칭 대신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저하'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전하(임금) 다음으로 높은 호칭이기에 순조가 보위에 오르고 수빈이 생존해 있었기에 대비급인 수빈을 저하라고 높여 부른 것이다.

이 칭호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실록의 중략 및 복사신공으로 살펴보자면,
순조의 원자 탄생 축하연에 앞서, '임금이 말하기를, “전문(箋文)의 두사(頭詞)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예조 판서 한만유(韓晩裕)가 말하기를, “빈호(嬪號) 아래에는 저(邸) 자 이외에 달리 놓을 만한 글자가 없습니다. 옛날에 궁저(宮邸)라는 글이 있었으니, 혜경궁(惠慶宮)의 규례(規例)에 의거하여 저(邸) 자를 쓰는 것은 미안스러울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이시수가 말하기를, “신 등이 아까 이미 예당(禮堂)의 말을 들었습니다만, 막중한 글자를 창출(創出)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당이 아뢴 저(邸) 자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순조 9년(1809년) 8월 14일) 또, 가순궁에 올린 치사·전문에 이르기를, 수빈 저하(綏嬪邸下)께서는 지닌 덕이 부드럽고 아름다움에 합치되고 자품(姿稟)이 화순(和順)하시어 영고(寧考)께서 간선(簡選)한 때로부터 매사에 예의(禮儀)를 따랐고, 소자(小子)가 높여 받드는 때에 이르러서는 겸양하는 마음을 깊이 지니셨습니다.....(중략) (같은 해, 월 15일 자 기록)

이런 궁궐의 호칭들에 대해 헷갈려 하시는 분이 많은데
예를 들어 사도세자의 사당이 경모궁이었는데 정조대왕도 아버지를 호칭할 때 ‘우리 경모궁께서...’라고 한 것처럼 왕실의 호칭은 모두 예우 차원에서 높임 말로 실제 임금의 휘는 절대 불러서도 안 되고 써서도 안 되는 조선의 법도 때문이었다.

해서 같은 음이 들어가는 역대 임금의 휘(이름)을 과거 시험보는 선비들은 줄줄 외우고 들어갈 정도로 신성시 됐다.
모든 임금은 휘, 호, 자, 묘호, 전호, 능호, 시호, 존호 등 수많은 호칭들이 있는데 모두 부를 수 없는 예법에서 생겨난 칭호로 연잉군도 아호가 양심헌이었고 사도세자가 죽고 혜경궁 홍씨가 궁에서 나갈 때 영조가 위로 차원에서 붙여진 혜빈이란 칭호처럼, 정조가 즉위하고는 혜경궁이라는 궁호를 내려 혜경궁 마마로 왕의 생모로써 예우를 받게 한 것처럼, 세조가 불쌍한 인수대비에게 수빈이란 호를 내려준 것처럼 모두 왕실 법도에 관계된 관례 중 하나였기에 헷갈려 할 필요 없이 그냥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면 되는 것이다.

끝으로 혜경궁 홍씨가 회고하는 가순궁(嘉順宮)을 보면,
‘덕성이 어질고 후덕하며 인물이 수려하여 명문고가 숙녀의 풍모가 있도다. 가순궁(嘉順宮)은 입궐한 후, 날 받듦에 정성을 다하니, 나 또한 친딸 같은 정이 있더라. 정조를 받듦에도 정성을 다하여 임금 뜻에 어긋난 일이 없으니, 정조께서 중히 여기시고 기대하심이 특별하시어, 매양 당장 무슨 중요한 부탁이나 하실 듯이 구시더라’
‘효성스럽고 공손하고 검소하니, 임금 섬김과 원자(순조) 보호와 교훈이 지극하니라. 공덕과 아름다움이 나라의 보내니, 이 한 몸에서 자녀를 많이 낳기를 바라니라. 이처럼 궁중에 화목한 기운이 넘쳐흐르니, 이는 근래에 보지 못한 일이라’

 

 

선희궁(宣禧宮)

 

칠궁의 마지막 사당은 영조(英祖)의 후궁이며 사도세자(思悼世子:장헌세자)의 친어머니이고 정조(正祖)의 친할머니인 영빈 이씨(暎嬪李氏)의 사당인 선희궁(宣禧宮)이다.

1701년 6살에 생각시로 뽑혀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대전에 소속됐다고 한다. 궁녀의 신분이었지만 평소 법도에 맞는 일 처리와 한 번 시키는 일은 일사천리, 속전속결이었기에 숙종의 귀여움을 받았고 ‘허허, 어른처럼 이런 일도 다 하는구나’라고 감탄하기도 했다고 한다.
1724년 평소 그녀를 좋게 보던 인원왕후가 중매를 서 31살의 늦은 나이에 영조의 승은을 입었다 한다.
선희궁은 정빈 이씨와 헷갈릴 수 있는데 영조가 정빈 이씨보다 나중에 얻은 후궁이다.
미색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영조의 사랑을 듬뿍 받아 슬하에 1남 5녀의 많은 자식을 두었다.
종2품 숙의에서 귀인을 거쳐 1730년 내명부 정1품인 빈의 첩지를 받고 영빈이 되었고 슬하엔 그 유명한 인물들인 화평, 화협, 화완 옹주와 사도세자 그리고 두 명의 옹주가 더 있었으나 조졸했고 영조가 가장 사랑했다는 화평옹주는 요절, 화협옹주도 병을 얻어 사망, 사도세자도 대처분에 의해 사망, 화완 옹주만 살아남았으나 정조를 끼고 돌다 분에 넘치는 행실로 정조에 의해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

칠궁 내 가장 한 많은 여인으로 자식들은 물론 손자(의소세손)의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고 1764년 음력 7월 26일 사도세자의 3년 상이 끝난 직후 사망해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영조는 장례를 후하게 치르라고 명하고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1764년 의열묘라 불리던 그녀의 사당을 1788년(정조 12년) 정조가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과정에서 선희궁으로 높였다. 원래 종로 신교동에 있었으나 역시 순종 2년 지금의 자리에 경우궁과 합사되어 현재까지 제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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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원(綏慶園)

 

고종 때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수경묘도 수경원으로 격상되었다.
연세대학교 내에 있던 그녀의 묘를 1968년 서오릉으로 이장하면서 ‘어제 영빈이씨 묘지(御製暎嬪李氏墓誌)’란 백자 묘지 5장이 무덤에서 나왔다고 한다.

정조 이후 조선의 왕이 모두 선희궁의 핏줄이라서인지 그 궁호만으로도 영조부터 순종까지 실록에서 150여 차례 넘게 거론되는 인물이나 그래도 그녀의 궁중 생활과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건 한중록에 잘 나타나 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건 그녀의 죽음인데 한중록의 기록을 보면 자살을 암시하는 글귀가 보인다. 그 해석 본을 소개하자면,
‘경모궁 혼궁에 오신 때면 더욱 부르짖으며 울고 슬퍼하시니, 이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몸을 마치시니 서럽도다.’라고 기록돼 있다.

전후 사정을 봤을 때 아들의 삼년상(26개월)을 마치고 신위가 사당에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세상을 버렸다고 하면서 ‘당신 설움이 마음의 병을 만들어 그 병환으로 몸을 마치셨다.’고 기록해 자살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 전에 등창 얘기가 있지만 영조의 표의록과 정조의 영빈행장에도 ‘마음의 병’이라고 기록돼 있어 자살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본래 사도세자가 죽던 날 오전에 선희궁이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대처분을 간한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결국 아비와 어미가 아들을 죽인 것인데 아들이 죽은 후부터 삶의 의욕이 없이 지내다 삶의 명분을 세손(정조)을 보호하기 위해서 영위해 나갔다고 하는데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에게 입적하라는 전교가 있자 그때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죽으려 했다는 것이다.
영조의 처분으로 삶의 목적을 잃고 참고 살다 아들의 삼년상이 끝난 직후 자살을 결행했다는 것이다.

실제 선희궁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세손을 위해 식사와 세수를 돌보았을 정도로 손주 사랑이 끔찍했다고 한다.

선희궁은 궁녀출신답게 미천한 출신으로 막일이나 하던 궁녀가 갑자기 임금의 승은을 입고 왕의 후궁이 되자 동료의 시기와 질투가 유독 심했다고 한다. 때문에 저승전(儲承殿)에 맡긴 사도세자를 보고 싶어도 일부러 찾지 않았다고 한다.
혜경궁 홍씨가 회고하는 그녀의 성품을 소개하자면,
‘어지신 중에 매우 엄숙하셨다. 자식을 사랑하나 사랑하는 와중에도 가르침이 엄하시니 자식들이 두려워하였다. 아드님을 공경하여 감히 스스로를 자모라 하지 않고 말씀을 극히 존대하시니 그 아드님도 어머니가 두려워 아주 조심하셨다.’
실제 선희궁은 ‘여범’이라는 여성교훈서를 친히 베끼고 혜경궁 홍씨를 지도할 정도로 궐내에서 엄하셨다고 한다.

끝으로 선희궁 묘소에서 19세 때 정조가 지은 영빈이씨 제문을 소개하며 마칠까 한다.
‘할머니께서 소자를 돌봐주신 은혜는 어머니와 다름없으셨고 세상을 가르치심은 엄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하늘처럼 크신 덕은 망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76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소자가 할머니를 우러러 기댐은 전보다 배나 더 했고 할머니께서 소자를 가련히 여기심도 전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춥지는 않은지 시장하지는 않은지 조석(朝夕)을 한마음으로 살뜰히 돌보셨습니다.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있음도 어느 것이 우리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희궁의 손자 사랑과 정조의 할머니 사랑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글이다.

 

 

경우궁(景祐宮)과 선희궁(宣禧宮)

 

선희궁의 사당은 육상궁과 연호궁처럼 경우궁과 같은 사당을 쓰고 있다.
둘의 연결고리를 찾으라면 동시대를 산 피붙이인 영조와 정조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는데 아무리 조합해봐도 이 두 분 외엔 합사의 명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괴리감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둘러보면 한두 개 정도 사당을 더 세울 수도 있는데 굳이 좁은 사당에 합사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건 신실 내부가 꽤 화려하다고 하는데 이분들의 실물을 직접 뵙지 못한 아쉬움이다.
어찌 됐든 이렇게 선희궁을 끝으로 칠궁의 관람을 마쳤다.

 

 

내삼문

 

이 내삼문을 나서면 들어갈 때 보았던 삼락당과 송죽재, 풍월헌이 나온다.

 

 

삼락당(三樂堂) 담장

 

재실과 붙어있는 건물로 칠궁 내에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권역이다.
이곳으로 통하는 문을 개인적으로 파악한 결과 5개나 되는데 칠궁 내에서도 비공개 구역이라고 한다.

 

 

삼락당(三樂堂)

 

송죽재, 풍월헌과 ‘ㄱ’ 자로 이어진 전각이다.
재실의 안채로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예를 행하는 곳이니 뭔가 깊은 뜻이 있었을 것이다.

실록엔 영조가 왕세자와 함께 종묘(宗廟)에 거동하였다가 왕세자는 먼저 환궁하고 임금은 육상궁에 들렸다 예를 행하고 삼락당에 머물러 이조참판 조명리와 왕기가 옹장에 감추어졌다는 풍수를 논한 일이 있었다는 영조실록 29년 7월 16일 자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삼락당을 어깨너머로 보고 삼락당 옆에 나 있는 서협문을 통해 들어서면 다시 재실로 이어지는데 이렇게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 칠궁의 관람을 마치게 된다.
비록 관람이 까다롭고 규모가 이토록 작아진 것은 안타깝지만 칠궁만의 그 어떤 매력은 분명 존재하니 종묘(宗廟) 다음가는 왕실 사당으로 꼭 한 번쯤 찾아볼 만한 사적지다.

 

 

칠궁 밖

 

밖에서 본 칠궁(七宮) 입구 솟을대문과 건너편에서 본 칠궁 정문 외삼문과 담장

칠궁을 정리하자면 일단 이곳에 모신 후궁들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식을 빼앗긴 어머니들이란 점이다.
법도 상 왕비의 아들이었기에 실제로 모자 관계가 성립되지는 않는다.
선희궁 같은 경우도 정성왕후에게 ‘중전께서 아기씨를 데려가시는 것이 좋겠어요. 나는 그저 원자의 사친에 불과해요, 내 어찌 감히 원자를 내 자식이라 여길 수 있겠어요’라고 말한 것과 공사문견록에 밝히기를 후궁은 자기 친딸조차 너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이 왕실의 법도였다고 한 것처럼 후궁은 그저 왕의 첩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예기에서도 말하기를, 남의 후사가 된 사람은 그 아들이 되므로 자신의 사친을 돌볼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고 한다. 사친을 돌볼 수 없단 뜻은 제사를 지낼 수 없다는 뜻으로 후궁 소생으로 후계자가 된 사람은 왕과 왕후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제사조차 지낼 수 없다는 게 겉으로 드러난 원칙이었다.

결론적으로 후궁은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는 서자의 한과 동일시된다고 보면 된다.
또 한 가지 공통점을 찾자면, (가순궁 제외)
(비자)⇒ (무수리)⇒ (각심이) 같은 비정규직에서부터 생각시⇒ 나인(항아, 홍수)⇒ 상궁(정5품, 지밀, 제조 등) 등으로 이어지는 계급처럼, 사실 궁녀는 관비를 뽑아 쓰는 게 원칙이었다. 때문에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로 보자면 궁녀는 천인 출신이었다.
효종 때 사노비를 뽑아 쓰려다 논란을 일으킨 효종대왕이나 내 맘대로 궁녀도 못 뽑느냐고 울며불며 하소연한 영조 임금처럼 궁녀는 공노비가 우선이었고 죽을 때까지 왕실을 위해 봉사한 왕실 소유 종으로 모두 미천한 출신이란 점이다.

하지만 모두 왕의 은혜를 입고 하찮은 직업에서 탈피, 부와 명예를 얻었다.
직업엔 귀천이 없다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겠는가?
이들에겐 천운도 있었겠지만 장희빈처럼 부당하게라도 엄청나게 노력해서 꿈을 이루었지만 역시 끝은 좋지 않았다.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곤 하지만 그런 정공법 같은 어려운 실천보단 차라리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며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진 몇몇 후궁들을 제외하곤 후궁은 왕실에 있어선 필수불가결의 요소이자 역사의 아웃사이더라 결론짓고 싶다. 이 후궁들 역시 자식이 왕이 되지 못했으면 여느 후궁들처럼 역사 속에 소리소문없이 묻혔을 것이다.
아무튼 이 일곱 명의 후궁들은 비록 자식은 빼앗겼지만 왕을 배출한 영광을 얻었고 이렇게 칠궁에 모셔져 영원히 제향 되며 나 같은 이에게 회자되었지만 죽어서 얻은 영광이 무슨 소용이랴 살아있을 때 잘 살아야 하는 것을...

각 궁의 뜻

육상궁(毓祥宮): 상서로움을 기른다.
연호궁(延祜宮): 복을 맞이한다.
덕안궁(德安宮): 덕 있고 편안하다.
저경궁(儲慶宮): 경사를 모아 쌓는다.
대빈궁(大嬪宮): 큰 부인
경우궁(景祐宮): 큰 복
선희궁(宣禧宮): 복을 널리 편다.

칠궁(육상궁) 위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