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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는 흐른다/한국고전

칠궁(육상궁) (上)

by 東以 2013. 4. 22.

외삼문(外三門 | 神三門)

 

청와대(靑瓦臺) 경내에 위치한 칠궁(七宮)의 외삼문(外三門), 청와대 영빈관(迎賓館)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칠궁의 공식 명칭은「육상궁(毓祥宮)」이며 조선왕조 500여년 동안 아들이 왕위에 오른 일곱 후궁(後宮)의 신주(神主)를 모셔놓은 사당(祠堂)이다.
쉽게 말해서 후궁의 신주는 종묘(宗廟)에 모실 수 없으므로 그들만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육상궁(毓祥宮)을 비롯해 저경궁(儲經宮), 대빈궁(大嬪宮), 연호궁(延祜宮),
선희궁(宣禧宮), 경우궁(景祐宮), 덕안궁(德安宮), 이렇게 칠궁이다.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추존왕 원종의 생모), 숙종의 후궁 희빈 장씨(경종의 생모), 영조의 후궁 정빈 이씨(추존왕 진종의 생모)와
영빈 이씨(사도세자의 생모),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영친왕의 생모)를 각각 모셔놓았다.

 

 

안내도

 

1725년(영조 원년)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숙빈 묘가 건립되었고, 1744년(영조 20년) 육상묘(毓祥廟)로 바뀌었으며, 1753년(영조 29년) 육상궁(毓祥宮)으로 개칭되면서 초가 사당에서 기와 사당으로 바뀌고 재실 및 수복방 등이 꾸며졌다고 한다.
훗날 고종 19년(1882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1908년 서울 주변에 흩어진 여러 사친묘(私親廟. 임금의 생모가 된 빈의 사당)를 합치면서 육궁이 되었고, 이후 1929년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의 신주를 덕안궁을 옮겨오면서 지금과 같은 칠궁(七宮)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는 상당히 큰 규모였으나 영빈관이 들어서면서 당시 규모의 3분의 1로 축소되었다고 하며, 세계문화유산인 종묘(宗廟)와 함께 묘사(廟祠)제도의 귀중한 표본으로 인정받아 1966년 사적 제14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정선필육상묘도(鄭歚筆毓祥廟圖 )<보물 제873호 개인소장>

 

정선이 말년에 그린 육상묘도(1739년 영조15년) 진경산수화로 당시 육상묘의 초가 사당을 볼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육상묘의 입구 좌우로는 수목이 울창하고 울타리 가운데에 홍살문이 있으며 초가 사당과 사당 앞 건물엔 조그마한 교탁이 놓여있는 것도 볼 수 있다. 그 당시 육상묘가 있던 곳은 현재 칠궁이 위치한 궁정동의 옛 모습으로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사진이 없던 시절 사진 기자의 역할을 톡톡히 한 귀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이제 후궁에 대해 잠시 살펴보자, 후궁 하면 일단 떠오르는 것이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임금의 소유물... 왕의 첩이다.
조선 시대 첩의 자식은 서자로 천대받아 그야말로 비굴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후궁의 소생은 임금의 아들이기에 원칙적으로 서자로 구분하지 않고 대군과 군으로 불리었으며, 군이나 옹주를 생산한 후궁은 그냥 후궁일 뿐이었다고 한다.
후궁의 말년은 더욱 비참했으며 자신이 모시던 왕이 승하하면 비구니가 되거나 자수궁이라는 궁에서 통합 관리되었고 죽어서도 시신이 어디에 묻혔는지 흔적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고 한다.
옆 나라 중국은 왕과 함께 순장되었다고 하며, 우리도 가야시대에는 순장제도가 있었다고 하며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위한 후궁의 역사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고, 이스라엘 역사서인 구약성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왕이 있는 곳엔 후궁이 있었다고 한다.
이처럼 역사와 전통이 깊었던 후궁들의 일상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놀고먹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하며, 조선 세종 때에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후궁의 품계와 그에 맞는 직무를 정하였다고 한다.

정1품-빈(嬪).        종1품-귀인(貴人) - 왕후를 보좌하고 부례를 논한다.
정2품-소의(昭儀). 종2품-숙의(淑儀) - 비례를 찬도함.
정3품-소용(昭容). 종3품-숙용(淑容) - 제사와 빈객을 맞는다.
정4품-소원(昭媛). 종4품-숙원(淑媛) - 연침을 베풀고 사시를 다스려 해마다 헌공함.
<참조: 세종실록 1428. 3. 23>

이렇게 내명부에도 위계질서가 세워지고 후궁들도 왕실의 한 축을 담당하였으며 현종 때 들어 비구니 사찰을 폐쇄하고 자수궁도 철거하면서 후궁에 대한 예우가 인간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한다.<참고로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 내에 있는 비천당 건물이 바로
그때 철거한 자수궁 목재로 지은 건물이었으나, 6·25 때 소실되고 지금은 복원된 건물이라고 한다.>


그렇게 후궁의 처우가 개선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왕족의 손이 귀해짐에 따라 후궁의 입지는 달라졌고, 왕을 배출한 후궁들이 생겨나면서 자연히 신분 또한 상승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왕비와 대등한 지위를 누린 후궁들이 있었을 정도로 왕실의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재실(齋室), 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칠궁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로 정면 여덟 칸 측면 세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재실(齋室)이라는 상징성에 단청은 하지 않았고 단일 건물치고는 꽤 크고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곱 혼령의 재실로 치면 결코 크다고는 할 수 없으며, 분주한 제사 준비를 위해 앞마당도 제법 넓은데 가운데 보면 생뚱맞게 돌이 놓여있다.

 

하마석(下馬石)

 

돌의 정체는 하마석이다. 말을 타고 내릴 때 필요한 것으로 보통 하마석엔 무늬가 없지만 후궁의 사당이라서 그런지 꽃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하마석이 재실 앞마당에 놓여있다.
그 당시 말을 타고 재실까지 들어올 수 없었던 법도를 감안하면 원래는 밖에 있는 하마비와 한 쌍이었을 것으로 짐작했는데 추측이 적중이라도 하듯 교육적인 목적으로 안에 들여다 놓았다고 한다.

 

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재실에 있는 현판으로 이름이 너무 운치 있어 재실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송과 죽은 소나무와 대나무로 사철 변하지 않는 절개를 뜻하는 것이고, 송죽재는 제사를 지내러 온 관원들이 묵었던 방이다.
오른쪽의 풍월헌은 육상궁을 지키는 관원들이 거처했던 방으로 바람과 달처럼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풍월헌은 영조가 이곳에 행차했을 때 국정을 논의했던 방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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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죽재(松竹齋)와 풍월헌(風月軒)



칠궁의 재실(齋室)인 이 건물에는 현재 <송죽재>와 <풍월헌>이란 두 현액이 걸려 있다. 이를 통하여 이전에는 이와 관련된 두 채의 건물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건물의 이름은 영조가 육상궁에 행차할 때 머물렀던 재실인 풍월헌, 그리고 1882년(고종 19년)의 화재 당시 영조의 어진을 옮겨 모셨던 송죽정(松竹亭)이라고 본다. 1772년(영조 48년) 영조는 숙빈최씨에게 영강(永康)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시보책(諡寶冊)을 육상궁 풍월헌에 봉안하게 한 바 있다.

이 건물은 위 기록들과 건축 양식 등으로 볼 때 1882년의 육상궁 화재 이후 건립된 듯하다. 이 때 송죽정의 뒤를 이은 이름이 송죽재다. 이 건물에는 한 때 각종 현판과 물품을 보관한 바 있었다.

한편 왕·세자·세손이 혼인할 때에는 왕궁 밖 별궁에서, 왕자·왕녀 등이 혼인할 때는 왕궁 밖 길례궁(吉禮宮)에서 의식을 치렀다. 즉 왕실의 혼인은 왕궁과 사가(私家)사이에 별도의 장소를 정하여 혼인을 치룬 것이다. 이 가운데 왕녀의 혼인시 부마는 길례궁에서 머물고 왕녀는 옹주궁(翁主宮)에서 머물게 하였다.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년)와 부마 김한신(金漢藎: 1720~1758년)이 혼인할 때의 기록이『옹정십년임자십이월 길례시자초 간택위시일기雍正十年壬子十二月吉禮時自初揀擇爲始日記, 1732년(영조 8년)』이다. 이 일기에서 길례궁은 임창군(臨昌君: 소현세자의 3남인 경안군의 장남, 임창군은 화순옹주 길례 때 혼주였음) 이혼(李焜)의 집이고, 화순옹주가 머물던 옹주궁은 대궁(大宮)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대궁이 어느 곳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이 일기에서 10월 29일 대궁 안 삼락당(三樂堂)에서의 1. 납채(納采)를 받았고, 11월 8일 2. 납폐(納幣) 11월 29일 3. 전안(奠雁) 예를 거행하였으며, 11월 29일 “대궁 삼락당에서 전안을 마친 뒤 부마 김한신은 집을 나와 안사랑 송죽재에서 머물렀다”라는 기록과 “12월 1일 부마와 공주가 대궁에 갔다. 대궁의 사묘(私廟)와 정빈이씨 사당에 4. 현례(見禮)를 드린 후 길례궁으로 갔다” 는 기록을 통하여 볼 때 삼락당과 송죽재는 대궁안에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묘와 정빈이씨의 사당이 있다는 기록으로 볼 때 대궁은 뒤에서 소개하는 창의궁(彰義宮)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견해가 사실이라면 지금 칠궁에 있는 삼락당과 송죽재는 어쩌면 1882년(고종 19년) 육상궁이 화재를 겪은 뒤 복원할 때 창의궁으로 부터 이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다만 옮겨 온 한 건물에 <송죽재>와 <풍월헌>이라는 두개의 현액이 걸리게 되었는데 송죽재는 이 건물이 재실임에서 또 옛 송죽정 건물을 계승한 이름으로, 풍월헌은 화재로 인하여 사라진 옛 풍월헌을 계승한 이름이라고 추정하여 본다.

1. 납채(納采)
신랑측 혼주(婚主)가 예서에 있는 서식에 따라 신부집에 편지를 보내는 것을 말한다. 편지에는 주소·관직·성명을 적고 간단한 문구로 혼인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2. 납폐(納幣)
신랑집에서 폐백으로 푸른 비단과 붉은 비단을 신부집으로 보내는 일

3. 전안(奠雁)
혼례 때 신랑이 기러기를 가지고 신부집에 가서 상 위에 놓고 재배하는 의식

4. 현례(見禮)
혼례 때 신부가 시댁 조상과 친척에게 처음으로 인사드리는 예



송죽재 현액(懸額)


풍월헌 현액(懸額)
고종(高宗) 어필(御筆)로 추정된다.



송죽재와 풍월헌



송죽재와 풍월헌의 뒷편
오른쪽의 팔작지붕은 삼락당(三樂堂)이다.

 

동쪽 삼문(神三門)

 

풍월헌(風月軒) 동쪽에 있는 중문을 통해 나오면 육상궁(毓祥宮)으로 들어가는 삼문(神三門)을 만나게 된다.
삼문을 지나 동쪽에 독자적으로 마련돼 있는 육상궁에 들어서면 좌우로 이안청(移安廳)이 있고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은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들어서 있는데 한눈에 봐도 이 마당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이안청은 영정이나 위패를 임시로 봉안하는 곳으로 육상궁과 연호궁의 임시 전각으로 쓰였던 것 같다.
사진 양쪽의 삼문 담장 위로 보이는 지붕이 동서 이안청이다.

 

 

연호궁(延祜宮)

 

현판은 연호궁이 앞으로 나와 있지만 육상궁과 같은 건물을 쓰고 있다.
칠궁의 사당은 모두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짜리 건물로 사실 혼자 쓰기엔 꼭 알맞은 크기다, 하지만 이런 작은 사당에 신주를 두 개씩 모시고 있으니 그래도 후궁은 후궁이란 생각이 든다, 참고로 왼쪽에 육상궁의 위패, 오른쪽에 연우궁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연호궁은 효장세자(진종: 추존왕)의 생모인 정빈 이씨의 궁호로 정조 2년에 경복궁 서북쪽에 사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연우궁이라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연우(祐)궁이나 연호(祜)궁으로 잘못 새겨진 오타라고 한다.

정빈 이씨는 영조의 후궁이라 할 수 있으나 따지자면 영조의 잠저 시절 첩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 나이 8살 때 동궁전(경종)의 생각시로 입궁했다고 하는데 일단 궁녀는 맞다. 구체적인 내용은 모르지만 숙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영조는 늦은 나이인 18세에 궁에서 출합했는데 출가할 때 눈이 맞아 데리고 나갔는지 나간 후에 맞은 것인지 모르나 확실한 건 잠저 시절 그녀의 몸에서 1남 2녀를 두었다는 사실이다. 경종 또한 동생인 연잉군을 아꼈으니 경종이 맺어준 것으로 추측해볼 수도 있으나 기록이 워낙에 희박해 둘 사이가 어떻게 맺어졌는지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다.

중매결혼인지 연애결혼인지를 떠나 그녀의 인생 또한 엄청나게 기구하고 많은 구설수를 낳았다.

일단 첫째 딸은 태어남과 동시에 세상을 등졌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효장세자 또한 10세에 요절했으며 영조가 그토록 아끼던 화순옹주도 출가 후 화목했으나 남편인 김한신(김정희의 증조부)이 죽자 14일 동안 금식을 하며 스스로 굶어 죽고 만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녀의 죽음이다.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어 입궁하게 되자 갑작스레 요절했는데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1721년)
입궁하자마자 죽었으니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를 공론화 시킨 이가 바로 고변으로 유명한 목호룡이며, 그는 궁인에 의해 죽었다고 독살설을 제기한 것이다.

그가 주장한 궁녀들을 물색하고자 형장이 마련되고 영조가 분노한 기록은 있으나 확실한 사망 여부는 현재까지 오리무중이며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영조 또한 즉위 후 이 일을 독살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으나 정치적 냄새가 풍기는 것은 사실이며, 더욱 무서운 건 효장세자(진종) 죽음에 대한 진실이다.

실록엔 효장세자의 병에 대해 그 어떤한 기록도 없이 갑작스레 죽었다고만 나와 있는데, 야사에 의하면 경종의 복수를 하기 위해 선의왕후 어씨가 독살했다는 주장이다. (정성왕후 서씨의 주장도 있음.) 선의왕후 어씨 또한 효장세자를 죽이고 스스로 자결했다는 설이 지금껏 팽배한데 실록의 기록 또한 한 나라의 왕후에 대한 기록 치곤 딱 한 줄만 형식적으로 기록해놓아 효장세자와 선의왕후의 죽음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게 하고 있다.

정빈 이씨 또한 실록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다만 잠저 시절 시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극진히 모셨다는 기록과 영조가 왕위에 오른 뒤 '정 4품 소원'으로 추증하고 1년 뒤 왕세자를 생산했다는 이유로 '정 1품 빈으로 추증하고 빈호를 '정'으로 내렸다는 것밖에 없다.
묘는 경기도 양주의 수길원으로 평소 고부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숙빈 최씨의 소령원과 가깝게 있다. 시호는 온희, 원호는 수길원, 궁호는 연호궁이다.

이처럼 경, 영, 정조 대의 궁중은 너무나 섬뜩한 일도 많았고 은폐된 기록이나 미스터리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육상묘(毓祥廟)

 

같은 건물 안쪽에 붙어있는 육상궁의 현판으로 궁(宮)이 아닌 묘(廟 사당)로 돼 있는 게 특이하다.
오른쪽 위로는 빨간색으로 '어필'이라 쓰여있고, 왼쪽 아래엔 '계미맹하'라고 쓰여있는데 계미년은 영조 39, 1763년이라고 한다.

육상묘, 육상궁은 우리에게 동이로 잘 알려진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건 흔히들 그녀를 무수리 출신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급 궁녀가 확실하기에 영조 또한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녀의 출신에 관해 지금껏 대충 밝혀진 바를 정리해보면, 일단 궁녀 출신은 맞다.
영조가 금평위 박필성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에 따르면 '병진년(숙종 2년)에 뽑혀 궁궐에 들어가셨으니 겨우 7살이셨다.'고 기록돼 있고 '수문록'에도 '고아인 최씨는 7세에 궁녀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라는 지방 설화에도 인현왕후 부친 민유중이 인현왕후를 업은 송씨(송준길의 딸)과 영광 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 다리에서 고아로 떠돌던 최씨 소녀를 만나 거두어 길렀고 인현왕후가 입궐하자 궁녀로 데려갔다고 전한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건 15세인 인현왕후가 숙종과 가례를 올릴 때 최씨의 나이는 12세였으므로 최씨가 7살에 궁녀로 들어왔으면 인현왕후가 데려갈 수 없다는 결론이지만 확실한 건 무수리 출신이 아니라는 해석을 해볼 수 있다.

또한 이문정이 왕궁 출입 관리인 유경광에게 듣고 적은 '수문록'에 보면, '숙종이 깊은 밤에 궁궐 안을 산책하다 나인의 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유독 한 나인의 방만 등축이 밝게 빛났다. 밖에서 몰래 엿보니,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한 나인이 합장을 하고 꿇어앉아 있었다. 임금이 매우 괴이하게 여겨 그 연유를 물으니 '소녀는 중전마마(당시 폐비된 인현왕후)의 시녀로 특별히 총애를 받았는데 내일이 중전마마의 탄신일입니다. 폐위되어 서궁에 계시면서 죄인을 자처하며 수라를 들지 않으십니다. 흑흑' 이런 기록이 있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건 당시 무수리는 출퇴근하는 궁궐의 비정규직으로 궁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기록은 고종이 후궁들에게 전했다는 최씨와 영조의 일화가 입에서 입으로 구비문학으로 전해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어느 날 영조가 어머니에게 침방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침방에서 일할 때 누비옷 만드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대답했다라는 것이다. 이후 영조는 죽을 때까지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 는 고종 황제의 증언으로 그녀가 침방 나인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수문록에 따르면 '인현왕후의 지밀나인이었던 최숙빈은 인형왕후가 궁에서 쫓겨나자 원래의 침방나인으로 복귀했다.'란 기록이 있어 개인적인 결론으론 인현왕후 처소의 침방 나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그녀는 1689년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기특하게 여긴 숙종의 승은을 입고 1693년 숙원에 봉해졌고 같은 해 첫째 아들 영수를 생산했으나 두 달 만에 요절하고 이듬해인 1694년(인현왕후 복위된 해) 9월 13일 연잉군 금을 출산했는데 휘가 '금'인 아이가 바로 영조다.
영조를 출산한 최씨는 숙의가 되었고 다시 1년 후 종1품 귀인으로 승격되었으며, 1699년(숙종 25)엔 단종의 복위를 축하하면서 왕실의 경사에 자연스레 묻어가 정1품 숙빈으로 봉해졌다, 선원록에 따르면 영조 밑으로 조졸한 왕자가 또 하나 있었으니 총 3명의 왕자를 출산할 정도로 숙종의 사랑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호산청에 세 번이나 들어갔으나 둘째인 영조만 살아서 나온 셈이다.
숙종은 특별히 창덕궁 선정전 뒤편에 그녀의 집인 보경당을 마련해 주었고 이곳에서 영조와 오래 살다 숙종이 마련해 준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숙빈이 살았다고 해서 이현궁은 숙빈방으로 불리었다.<드라마 동이에서와 같이 그런 성품이라면 정말 사랑받을 만하다.^^>

그렇게 왕실 소유 저택에서 여생을 보내다 숙종 44년(1718년)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한다.

묘를 정할 때 목호룡이 장지를 마련해 주었으나 명혜공주(현종의 딸)의 청룡터였던지라 욕만 뒈지게 먹고 지금의 소령원에 안장되었다.
영조는 1753년 후궁 책봉 60주년을 맞아 시호를 화경(和敬)이라 올리고 묘(廟)를 육상묘에서 육상궁으로 묘(墓)를 소령묘에서소령원으로 고쳐 올렸으며 영조 나이 79세인 1772년 8월 휘덕안순수복(徽德安純綏福)이라는 존호를 더할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다.
영조 역시 어머니의 원을 능으로 승격시키고 싶어했으나 영조의 뜻대로 되지 않은 유일한 일이었다.
영조가 제사 지내며 한 말로<자식 된 이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는다.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유명해진다.>란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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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이,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당쟁이 격화되어 반대파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숙종의 시대, 서인으로 대표되는 인현왕후와 남인으로 대표되는 장희빈 사이에서 숙종의 승은을 입어,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백척간두의 상황에서, 자신과 아들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던 숙빈 최씨, 궁궐에서 쓸 물을 위해 온종일 물동이를 이고 날랐던 한 여인의 숨어있는 눈물이 어떻게 파랗게 승화되어 조선 제일의 여인상, 어머니상으로 만들어져 가는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번 느껴보자.


■ 개설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년(현종 11)∼1718년(숙종 44), 조선 숙종(肅宗)의 후궁으로 영조(英祖)의 어머니(私親)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무수리에서 일약 왕의 어머니가 된, 숙빈 최씨의 숨어있는 눈물이 배어있는 곳인 오늘날의 서울 종로구 궁정동(宮井洞). 궁궐과 우물이 지명에 함께 포함돼 있는 궁정동은 숙빈 최씨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숙빈 최씨는 7세에 궁에 들어와 궁녀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바치는 수사(水賜: 궁궐에 필요한 물을 나르는 무수리)였다. 바로 이 궁정동의 옛 자리에 궁궐에서 주로 사용하던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궁중에서 가장 천하다는 무수리로 입궐하여, 숙종의 승은을 입어 연잉군(延礽君)을 낳고, 마침내 그 품계가 정1품 빈(嬪)에까지 이르렀고, 아들인 연잉군은 왕위에 올라 52년간이나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끌었으니,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 숙빈 최씨는 가장 극적인 삶을 산 여인의 표상이었다.

■ 태생과 관련된 기록

1. 영조가 즉위 1년(1725) 금평위 박필성에게 짓게 한 숙빈 최씨 신도비명에는 숙빈 최씨의 아버지는 최효원으로 충무위부사과이며, 조선 21대 왕인 영조의 어머니이다. 숙종 2년(1676)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갔으며,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대하되 공손하고 부드러워 모두 그 환심을 샀다고 기록되어 있다.

2. 야사에는 최씨가 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사람으로,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고 한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부친 민유중(閔維重)이 인현왕후를 업은 부인 송씨와 영광군수로 부임하러 가는 도중 정읍 태인면의 대각교에서 고아로 떠돌던 최씨 소녀를 만났다. 인현왕후의 어머니는 어린 숙빈이 당시 7세였던 인현왕후와 닮은 데가 많은 것을 보고는 가엽게 여겨 함께 데리고 갔다. 그 후 인현왕후가 입궐하면서 궁녀로 들어왔다고 한다.

■ 숙종과 최씨의 드라마틱한 만남

1. 숙종은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어갈 무렵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었다. 조선후기 이문정이 쓴 수문록(隨聞錄)을 보면,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킨 지 5, 6년이 지난 후 어느 날 궁궐을 거닐다가 한 궁녀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하고 그 방을 찾았다. 최씨는 자신의 방에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천지신명에게 자신이 모셨던 민씨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다. 사유를 묻는 숙종에게 내일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어서 왕후가 평소에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고 비는 중이었다고 대답했다.”

2. 숙종은 궁녀만도 못한 자신의 경솔했던 처사를 후회하면서, 옛 주인을 섬기는 그 궁녀를 갸륵하게 여겨 가까이 했고, 아들을 낳았다.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영수라고 지었지만, 두 달 만에 조졸하고 만다. 숙종 20년(1694) 9월 최씨가 둘째 아이(연잉군, 영조)를 출산하자 숙종은 출산을 도운 호산청의 내시와 의관에게 내구마를 상으로 주었다. 우의정 윤지완이 ‘내구마가 어찌 환시와 의관이 감히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고 차자를 올려 반발했지만 왕자가 드물었던 궁궐에서 숙종의 기쁨을 꺾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무수리 최씨는 숙원에서 내명부 1품인 빈으로 책봉되는 영광을 안았다.

■ 숙빈최씨, 장희빈과 대척점에 서다.

1. 장희빈의 득세로 권력을 되찾은 남인 세력을 몰아내는데 두 차례에 걸쳐 숙종에게 결정적인 밀고를 한 사람이 바로 숙빈 최씨였다. 수문록에 주로 장씨가 최씨를 핍박했다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은 최씨가 서인인 인현왕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숙빈 최씨는 숙종의 장인인 김만기와 연결되어 있던 숙종의 유모인 봉보부인과도 가까웠다.

2. 숙종 20년(1694)에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보면, 인현왕후의 오빠였던 민진원은 단암만록(丹巖慢錄)에서 ‘김춘택이 봉보부인을 통하여 최씨와 계략을 세워 남인의 정상을 주상에게 자세히 보고하여 환국이 이루어졌다’고 적고 있다. 당시 조정은 남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서인 김춘택은 남인에게 빼앗긴 정권을 되찾기 위하여 서인들과 모의를 하고 있던 중, 여기에 가담했던 김석주의 가인(家人) 함이완이 남인들의 회유에 넘어가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게 되었다.

이를 들은 숙종이 역모 관련자들을 심문하도록 하자 서인은 오히려 남인 장희빈의 오라버니 장희재가 장모로 하여금 숙빈 최씨의 생일날 독이 든 음식을 가지고 입궐케 하여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최씨가 독살설이 모두 사실이라고 함으로써 숙종은 서인 측 주장을 받아들여 남인들을 정계에서 퇴출시키고 이후로 조정은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3. 숙종 27년(1701) 인현왕후 민씨가 병사한 후 장희빈이 내전을 질투하여 모해하려고 했다며 자진명령을 내린다. 세자의 애걸과 많은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장희빈은 10월 10일 사사된다. 실록을 보면, “대행 왕비가 병에 걸린 2년 동안에 희빈 장씨는 비단 한번도 기거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중궁전’이라고 하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라고 일컬었으며,....... 취선당의 서쪽에다 몰래 신당을 설치하고, 매양 2, 3인의 비복들과 더불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기도하되, 지극히 빈틈없이 일을 꾸몄다........ 이때에 이르러 무고의 사건이 과연 발각되니, 외간에서는 혹 전하기를,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하였다.”

■ 숙빈최씨, 아들을 통해 다시 태어나다.

1. 숙빈 최씨는 숙종 44년(1718)에 49세의 나이로, 영조가 즉위하기 전에 별세하여 왕실의 법도에 따라 왕비의 무덤인 능이 아닌, 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고 6년 뒤에 왕위에 오른 영조는 어머니의 불행한 신분을 잊지 못했다.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를 받들었으며, 친필 비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2. 영조는 생모에 대한 효심과 열등의식으로 즉위 초부터 숙빈 최씨의 묘를 능으로 만들길 원했다. 즉위 후 소령묘를 왕비릉으로 격상시키고자 애를 쓰지만, 조정 신료의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다가, 후일을 기약하고 숙빈 해주 최씨 소령묘(昭寧墓)라는 친필 비석을 세우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영조의 마음을 읽은 몇몇 사람들이 소령원을 능으로 추봉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영조는 상소의 내면에 숨겨진 뜻을 알고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조는 즉위하던 해인 1724년 생모를 기리기 위해 경복궁(景福宮) 이웃에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숙빈묘(淑嬪廟)라 했다. 영조는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짓고는 직접 제문을 지어 올리며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영조 20년(1744), 영조는 어머니의 묘호를 '소령'으로 올린 뒤 묘갈(墓碣: 무덤 앞에 세우는 비)에 이런 글을 새겼다. “아! 25년 동안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 듯하다....... 붓을 잡고 글을 쓰려 하니 눈물과 콧물이 얼굴을 뒤덮는다. 옛날을 추억하노니 이내 감회가 곱절이나 애틋하구나.”

3. 영조 29년(1753)에는 숙빈묘를 승격시켜 육상궁(毓祥宮)이라 부르면서, 다시 한번 소령원(昭寧園)에 친필 비석을 세우게 된다.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이라는 시호를 붙였고 후 조선국 화경 숙빈 소령원이라는 친필 비문을 새긴 비석을 만들었다. 숙빈 최씨의 묘소는 소령원으로 봉해졌다.


■ 결어

역사적으로 보면, 숙빈 최씨는 자신이 모셨던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된 상황에서, 지난날 중전의 자애로움을 잊지 못해 상기하다가 우연히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는 의로운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환국의 정국에서 정세를 세밀히 꿰뚫어 내다보면서, 자신과 아들 연잉군의 삶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놓고, 슬기롭게 잘 대처해 나갔던 총명하고 영민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연호궁(延祜宮)과 육상궁(毓祥宮)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한 사당에 합사되어 같이 모셔져 있다.
연호궁의 편액은 굉장히 화려한데 반해 육상궁의 편액은 세월의 때가 묻어있어 동시대의 사람이지만 선배와 후배, 시머어니와 며느리의 구분이 엄격하게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밑에서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절대 육상궁의 현액은 볼 수 없다. 연호궁의 현액처럼 그냥 본인의 신실 앞 추녀 밑에 동서로 나눠 걸었으면 훨씬 더 예쁘고 보기 좋았을 것을 왜 이렇게 걸어놓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 사당은 원래 육상궁의 사당이었으나 고종 7년인 1870년에 연호궁의 신주를 이리 옮겨와 함께 모셔지게 되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5대손이자 영조의 6대손인 고종의 뜻을 헤아려봤을 때 세들어 살게 한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시어머니를 모시게 한 깊은 뜻이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들의 인연은 죽어서도 함께 하니 보통 인연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역사에 전해지는 육상궁과 연호궁의 화목했던 가정사를 짐작해봐도 지금의 사당은 바늘과 실같이 어느 한 쪽을 떼어놓을 수 없는 그런 관계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안청(移安廳)

 

육상궁 권역을 나오기 전 서쪽에 있는 이안청이다.
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냉천정을 지나게 된다.

 

냉천정(冷泉亭)과 냉천(冷泉)

 

냉천정은 영조가 어머니의 제삿날에 재계하며 머무르던 곳이다. 냉천정 뒤에는 냉천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제사 때 사용하던 우물이며, 영조 3년 영조가 이 우물에서 물 맛을 보곤 냉천 벽면에 어필로 오언절구를 새겨넣었다고 한다.

 

등자(鐙子)쇠

 

냉천정을 훑어보던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바로 홑처마 밑에 달린 걸쇠다.
냉천정 대청마루로 뚫린 방 위에 달린 것인데 한옥에서 볼 수 있는 가지각색의 걸쇠 중 사오정의 무기인 월아산이 연상되어 어재실의 등자쇠로는 사실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더운 여름, 앞의 연못에서 멱을 감고 분합문을 획획 들어 올려 등자쇠에 걸어놓고 자연과 한몸이 되는 순간을 상상하면 기분이 절로 상쾌해진다. 한옥의 분합문과 등자쇠는 방과 마루가 하나 되는 선조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고, 사실 베란다 확장은 이 시절에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연(紫淵)

 

냉천정 앞에 보이는<자연>이란 연못으로 깊은 연못의 빛깔을 표현할 때 자줏빛이 감도는 심연을 뜻하는 연못을 말한다.
냉천에서 흘러나온 물이 고여 연못이 됐고, 연못에 비친 달을 품을 수는 있으나 자줏빛이 띨 정도로 깊지는 않고 무릎 정도의 깊이다.
그렇다고 진짜 그런 뜻으로 지은 것은 아니며<자연>이란 용어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는 도가적인 표현이라고 한다.

아무튼 궁궐 전각의 이름도 그렇고 정말 조선 시대 학자들은 이처럼 함축적인 이름을 짓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기본 그 이상의 지식은 당연하겠거니와 자줏빛을 띨 정도의 깊고 깊은 학문이 뒷받침이었을 것이다.

 

 

수복방(守僕房)

 

냉천정의 우측에 있는 수복방(守僕房)은 일곱 칸짜리의 긴 건물로 칠궁을 지키는 궁지기와 칠궁의 제사에 쓰이는 각종 물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 같은데, 칠궁이라서 일곱 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수복방치고는 꽤 긴 건물 같다.
이렇게 냉천정 권역을 둘러보고 나서 서쪽에 있는 삼문을 통해 들어서면 사당 네 채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사당은 엄귀비의 신위를 모신 덕안궁이다.
이곳은 육상궁 권역의 삼도와 다르게 어도가 사당 곳곳으로 이어져 있다.

 

 

덕안궁(德安宮)

 

덕안궁(德安宮)은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의 신위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칠궁의 가장 막내이며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궁이기도 하다.
그녀가 영친왕을 출산하자 고종황제는 경운궁 내에 경선궁을 지어주며 따로 거처를 마련해 주었고, 그녀 사후 현 태평로 1가에 엄귀비의 사당을 지어 그 궁명을 덕안궁(德安宮)으로 개칭하였으며, 1929년 7월 11일 덕안궁이 육상궁 안으로 옮겨지면서 지금의 칠궁이 되었다고 한다.

본래 귀비(貴妃)란 황제국에서 쓰는 최고 지위의 후궁을 가리키는 칭호이자 품계다. 조선 같은 제후국은 빈(嬪)이 후궁의 품계 중 최고의 품계였지만 그 당시 비(妃)라는 칭호를 사용했기에 그녀를 고종의 계비(繼妃)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왕비(王妃)는 생전의 명칭이고 죽어선 왕후(王后), 대한제국 땐 황후(皇后)로 통하기에 그녀는 계비가 아닌 후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잠시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녀는 8살에 궁녀로 입궁해 명성황후의 시위상궁(몸종의 일종)으로 명성황후를 보필하는 일을 하던 중 고종의 눈에 들었다고 전해지며 을미사변 후 고종의 승은을 입어 복중의 아기씨를 잉태하였고, 광무 1년(1897년) 종1품 귀인(貴人)으로 책봉되어 정식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때 출산한 아들이 영왕, 영친왕, 종묘에도 모셔진 왕세제 의민황태자(이은 李垠)이다.

영친왕(英親王)은 대한제국 선포 후 8일 후인 10월 20일에 태어난 고종황제(高宗)의 유일한 제국의 아들이다.
물론 이육(李堉)과 이우(李堣)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대한제국 멸망 후에 태어났기에 제국 시절 탄생한 아들로는 의민황태자가 유일하다. 또한 완화군(1868년생), 순종(1874년생), 의친왕(1877년생) 등의 아들도 있으나 모두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 태어났다.

후궁으로는 일취월장하여 3년 후인 1900년 8월에 후궁의 최고봉인 순빈으로 봉해졌으나 광무 5년 1901년 10월에 빈을 넘어선 비로 봉해져 이후로는 귀비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는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국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조치로 그녀는 일종의 복 많은 수혜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그녀의 위상 또한 대단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엽기적 비행은 매천야록에 잘 나와 있으나 그녀의 행적은 구한말 궁인들의 증언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대부분이며 고종과 조금이라도 눈이 맞은 궁녀는 바로 다음 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는? 후문이 전해지고 있으며, 그런 황제국의 귀비로 살아서 그런지 사당 지붕의 기와도 사진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알록달록한 형형색색의 기와로 덮여있다.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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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귀비의 실물을 처음 보고 실망하신 분들이라면 그건 어디까지나 후궁의 이미지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무엇보다 외모에만 관심을 갖는 매우 편협한 시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관해 조금이라도 알고 나면 외모로 상대를 평가했던 자신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실제로 그녀는 고종을 모시고 아관파천을 주도할 정도로 강단있는 여성이었고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졌던 분으로 교육열이 누구보다도 높아 1905년 양정의숙(현 양정고등학교)을 1906년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와 진명여학교(현 진명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는데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후원하였고, 또한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에도 정기적으로 후원금을 보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할 정도로 근대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건강해 보였던 그녀는 안타깝게도 장티푸스로 고생하다 1911년 7월 20일 향년 57세를 일기로 경운궁 함녕전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 현판과 내부

 

그녀는 경술국치 후 귀비로 불리었으며 사망 후<순헌>이란 시호를 받아 지금의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가 되었다.
묘소는 청량리에 위치한 영휘원(永徽園)이다.
그녀의 인생을 정리하자면, 한마디로 안타깝지만
기와의 색처럼 아무리 오색찬란한 인생을 살았다고 한들 구한말 힘없는 나라, 어느 힘없는 황제의 후궁일 뿐이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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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아들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사진이다.
안타깝게도 고종황제의 자식들은 모두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송구스러울 정도로 박복한 인생을 살다 가셨다.
이분들의 삶에 관해 대충 이야기해도 각각 책 한두 권은 거뜬할 정도다.
항간엔 일본에서 이방자 여사를 검진한 결과 애를 낳지 못하는 불임판정에 힘입어 영친왕과 혼인시켰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이분들 슬하엔 진(晉)과 구(玖), 두 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일본에서 태어난 맏아들 진은 고국을 방문했다가 귀국을 하루 앞둔 1922년 5월 11일 오후 3시 12분 숙소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른바 원손 이진(李晉)이 태어난 날이 1921년 8월 18일이었으니, 그는 미처 돌맞이도 하지 못한 채 약 8개월여 만에 허망하게도 이승과 작별을 하고 만 것이다. 알려진 병명은 '소화불량'이었다고 하며, 이 죽음을 두고 수많은 의문이 제기됐었다.
순헌황귀비 엄씨 묘소인 영휘원(永徽園) 경내에 있는 숭인원(崇仁園)은 의민황태자의 아들 원손 이진의 무덤으로 공교롭게도 할머니(엄귀비)와 손자가 나란히 마주하며 잠들어 있다.

가슴 아픈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음 사당인 저경궁(儲經宮)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육상궁(칠궁) 위치정보